남도 불교 지명이야기

벌교 징광리 1

아침 해가 떠올라 어둠을 거두어가니 ‘징광(澄光)’

보성군 존제산 줄기 큰봉 자락에 자리한 징광리는 징광사에서 유래됐다. 지역에서는 이곳을 징괭, 징광이라고 부르며, 징광사가 있던 마을은 ‘원징광’으로 부르고 있다. 땅이름만으로도 이곳에서 징광사가 차지했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폐사지인 징광사지

징광사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창건설은 백제 때 처음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 존자가 영광 불갑사, 나주 불회사, 보성 징광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중창기 기록에는 ‘신라 법흥왕 때 중창되어 사자산문 개창조인 철감선사 도윤스님(798-868)이 수행했다’고 전한다. 조선 태종 때에 자복사로 선정되었고, 조선초 인문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화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19세기까지 징광사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 이후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징광’은 ‘지해징청혜광독요(智海澄淸 慧光獨耀), 즉 지의 바다가 맑고 푸르며 혜의 빛이 홀로 빛난다’라는 말에서 ‘징(澄)’과 ‘광(光)’을 차용해 이름 지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보성 징광사는 광주 증심사와 인연이 남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증심사를 창건한 철감국사와의 인연도 그러하고, 증심사 오백전을 건립한 광주 부사 김방의 고향이 바로 보성인 것도 그러하다. 김방은 징광사 중창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루는 김방이 사냥을 나갔다. 산속에서 노루를 만나 화살로 옆구리를 맞혔다. 노루는 피를 흘리며 달아났다. 김방은 화살을 맞은 노루를 쫓아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곳은 잡초가 무성한 폐사지였다. 무너진 전각 안에 있는 불상을 바라본 김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상의 옆구리에 김방이 쏜 화살이 박혀있고,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방은 부처님이 자신의 살행 업을 제도하기 위해 노루의 몸으로 현신했음을 알아차리고 참회의 절을 올렸다. 허물어진 불전을 살펴보니 기둥과 보 사이에 상량문구가 보였다. 신라 법흥왕 때 중창하였다는 내용이다. 김방은 권선문을 쓰고 시주자를 모아 옛 징광사의 흔적을 찾아 복원했다.

징광사지를 지키ㅗ 있는 귀부와 이수

조선 중기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영월대사가 징광사 중창기를 썼다. 영월대사는 “낙안벌 서쪽에 금화산이 있다. 그 가운데 절이 있으니 바로 징광사이다. 산은 높고 물이 맑은 곳이다. 숲은 깊고 계곡은 고요하니 산을 좋아하고 물을 즐기는 은자가 살기에 적합하다. 금강의 성품으로 지혜의 꽃을 피우니 금화라고 하였다. 부처의 지혜처럼 넓은 바다에 아침 해가 떠올라 어둠을 거두어가니 징광이라 부른다”고 했다.

당시 임경업(1594~1646)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해 영월스님을 친견하고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낙안군수 임경업 장군의 후원으로 징광사는 12암자를 거느린 대가람의 품격을 갖추게 됐다. 현재 징광사는 폐사지로 남아있다. 다만 절터에는 커다란 귀부와 이수 한 쌍이 남아있어 옛 징광사의 사격을 짐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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