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불교 지명이야기

서구 절골마을

절골마을 표지석

광주정신의 산실… 조선최고 시인과 영의정 배출
올해로 5.18민주화운동 42주기이다. 광주의 5월이 승화되어 대한민국의 ‘민주’를 꽃피웠다. 오늘 우리가 만끽하는 민주화는 오랜 세월 이어온 ‘광주 정신’라 하겠다. 광주정신은 불의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일어서는 정의이기도 하다. 가까이는 동학농민혁명, 광주학생의거, 한말의병은 물론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 초개와 같이 일어선 의병장의 희생과 이어진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호남사림의 문을 연눌재 박상(1473-1530)이 있다. 연산군 당시 엄혹한 시절, 연산군 후궁의 아비가 전라도에서 온갖 횡포를 부리자 나주 관사인 금성관에서 그 죄를 물어 장살시켰다. 다행히 박상이 한양으로 압송당하는 길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쫓겨났다. 박상에게는 목숨보다 충절과 애민정신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박상은 광주 서구 절골마을 출신이다. 매월동 농수산시장에서 남평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백마산, 왼편으로 절골이 나온다. 1400년대 중반 충주 박씨 지흥이 세조의 왕위찬탈에 낙담해 벼슬 꿈을 버리고 낙향했다. 오늘의 서구 백마산 건너편 방하동 마을이다. 본래 이곳은 박지흥의 처가 마을이다. 박지흥의 둘째아들이 눌재 박상이고, 셋째 박우의 아들이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1523~1589)이다.

절골마을은 충절의 선비이자 1,200여 편의 한시를 남긴 조선 최고의 시인 박상과 영의정을 지낸 박순을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절골마을의 옛 지명은 방하동(芳河洞)이다. 마을아래에 커다란 연방죽이 있어 연꽃 향이 멀리 퍼졌고 마을이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지명을 두 글자로 정하면서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사동(寺洞)으로 기록했다. 아쉽게 절골마을에 언제 사찰이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사찰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다만 마을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사찰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할뿐이다.

그리고 오늘의 절골마을이 사찰 터로 추정할 뿐이다. 방하동의 유래가 된 연방죽도 사찰에서 방죽에 연을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연방죽도 사라지고 이름만 남아있다. 광주정신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눌재 박상의 충절은 태몽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박상의 부모가 장성 갈재에서 하룻밤 묵을 때 입암산 바위가 어머니 품에 들어오는 꿈이다. 입암산 바위의 정기를 받은 박상은 연산군의 잘못에도 목숨 걸고 지적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담양부사 때는 순창 강천사에서 중종의 첫 부인 단경왕후를 왕비로 복권해야 한다는 ‘신비복위소’를 상소하여 유배당하기도 한다. 이렇듯 충절과 애민의 목민관인 박상의 정신은 오늘에까지 이어져 광주정신이 된 것이다.

절골마을 안쪽에는 봉산재(鳳山齋)가 있다. 봉산재는 눌재 박상선생의 아버지 찬성 박지흥의 재실이다. 곁에는 박지흥의 장남 하촌 박정의 재실이 있다.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신위는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호영당(松湖影堂)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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