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불교학당

연기법

2021년 9월 9일 강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는 인연법은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겨나며 그것은 또 다른 존재의 인연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모든 존재 혹은 법[제법:諸法]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며 또 그것은 다른 존재와의 인연이 되기도 한다.

인(因)이란 직접적, 일차원적인 원인을 말하며 연(緣)이란 간접적, 이차적인 원인을 말한다. 어떤 것들이 서로간 직접적인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간접적으로라도 작용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일에 있어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행위가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방해하지 않는 행위 역시 보조적인 조건일 수 있다.

특히나 초기불교,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연기법에 있어서 모든 존재의 관계성을 분별하는 것이 핵심으로 꼽힌다. 흔히 분별이라고 하면 ‘나’의 ‘외부 세계’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욕심 때문에 업을 짓고 업을 지음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제법의 관계성을 이해했을 때 욕탐이 일어나는 구조를 볼 수 있고, 그러한 개념이나 관념을 깼을 때 욕탐을 끊는 선법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초기불교 설일체유부에서는 제법분별에 따른 인과론으로 6인 4연 5과를 꼽는다. 먼저 주된 원인인 6인으로는 능작인, 구유인, 상응인, 동류인, 변행인, 이숙인 등을 말한다. 능작인이란 어떠한 사건에 대해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새싹이 자라난다면 홍수가 난다던가 가문다던가 하는 일 없이 새싹이 올라올 수 있게 하는 사회의 모든 조건을 능작인이라 볼 수 있다. 구유인은 생주이멸의 4상과 지수화풍의 대종은 존재와 동시에 병존하며 생기는 것이며, 서로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는 것이다.

상응인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에서 벌어지는 작용이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상인이라 하며, 동류인은 순간순간 변화하는 것들에서 전찰나와 후찰나가 이어지는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변행인은 오염된 법이 번뇌가 발생한는 원인이라는 것이며, 이숙인은 좋은 선법을 하면 좋은 과를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4연은 주변의 조건을 말한다. 먼저 증상연이란 일체법들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등 무간연은 현재 6식은 전 찰나의 마음인 의근이 이어져 생긴다는 것이다. 소연연은 마음이 일어나기 위한 대상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인연은 원인으로서의 조건, 유위법을 낳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5과는 증상과, 사용과, 등류과, 이숙과, 이계과의 다섯 가지 결과이다. 증상과는 자신 외의 모든 것이 걸려 있는 가장 넓은 범위의 결과이다. 사용과는 선비 사(士)를 써서 사람과 관계되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인과를 말한다. 등류과는 번뇌가 오염법의 원인이 되는 것, 선법이 선과를 낳는다는 것이고, 이숙과는 선업은 즐거운 과보이고 악업은 괴로운 과보가 됨을 말한다. 이계과는 열반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경지라는 것을 뜻한다.

연기라는 말은 실은 어디에든 붙여 쓸 수 있다. 모든 행위에 일어나기 때문에 어디든 적용할 수 있지만 특히나 중관학파에서는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연기법은 인과법이다. 인과란 거짓이 아닌 진실 그대로임을 알아야 한다.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는 인과응보이며, 선법은 행복을 부르고 불선법은 불행을 부르더라는 것이다. 두 번째 연기법은 모든 존재와 정신적, 물질적 요소들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며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상대적인 관계에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며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 번째 연기법은 중관학파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으며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개념은 항상하는 것이 없고 변화하며, 어떤 것을 구성하는 요소 역시 변화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실체가 있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업의 형성이 곧 존재이다. 실체로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듯, 자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찰나에 생성되고 소멸하며 상속되는 오온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오온의 변화가 시간이며 우리는 그 러한 존재를 ‘자아’라고 믿을 뿐이다. 윤회란 오온이 찰나에 생성소멸함으로써 전이하는 현상이며, 마치 스크린에서 1초에 24장의 사진을 이어 붙임으로써 동영상이 되듯이 우리의 삶도 찰나간의 연속이 마치 아트만의 영원함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기름과 심지로 이뤄진 불꽃을 ‘등잔불’이라 하듯, 오온의 연속을 ‘자아’라고 이름 붙이지만 이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강의 물은 한 순간도 같은 물의 상태가 아니지만 그저 우리가 ‘한강은 늘 한강’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있다”고 하면 자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가 있을 뿐이며, “없다”라고 하면 무언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자성으로서의 무엇이 없다는 의미이다. 연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다 있는 것이다. 나, 너, 조건, 공성, 해탈, 윤회, 성불, 지옥… 이러한 것들이 그저 있는 것인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있는 것인지 바로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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