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마음의 눈이 멀면

오늘은 법구경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송을 가지고 법문을 하겠습니다. 자, 우선 게송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합장하시고 따라하십시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이끌어가고,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괴로움이 저절로 따르리라.

수레바퀴가 황소 발굽을 따르듯이.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이끌어가고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행복이 저절로 따르리라.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이.


법구경에 제일 처음 나오는 1번과 2번 게송은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법구경은 부처님께서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들을 게송의 형태로 해서 모아 놓은 경전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신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제일 먼저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사회가 발전하려면,

법과 제도를 잘 갖추어야 된다는 말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첫 번째 게송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스님은 짝꾸빨라 스님인데, 건강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수행한 결과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순간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왜였을까요? 짝꾸빨라 스님은 전생에 의사였는데, 눈이 먼 어떤 여인이 치료를 받으러 왔습니다.

여인은 눈을 낫게 해주면 자기 자신과 아들, 딸을 모두 노예로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의외로 한 번에 다 나아서, 졸지에 자기랑 자식들이 모두 이 의사의 노예가 되게 생겼습니다하여 여인은 일부러 안 나은 것처럼 속임수를 쓰고, 그 사실을 간파한 의사는 눈을 멀게 하는 약을 처방하여 여인의 눈을 다시 멀게 했습니다. 짝꾸빨라 스님은 이러한 과오로 인해 아라한과를 증득하고도 눈이 머는 과보를 받았습니다.

짝꾸빨라 스님은 깨달음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목표 때문에 다른 것들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발에 밟혀 벌레가 죽거나 말거나 내 눈이 멀거나 말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거나 말거나 나는 깨달음만 얻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짝꾸빨라 스님은 정말 훌륭한 스님이지만 깨달음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은 곧 나쁜 마음입니다. 부처님은 나쁜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나쁜 행동이 나온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두 번째 게송에는 병든 자식의 치료비를 아끼려다 그만 자식을 죽게 만든 구두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재물에 눈이 먼 구두쇠가 나옵니다.

마음은 찰나 찰나 이어진다

게송에서는 마음이 앞서가고 마음이 이끌어가고 모든 것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 느낌 혹은 충동이 마음 속에서 먼저 일어납니다. 다만 대부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팝콘을 먹거나, 밥을 먹거나, 잠을 자려고 하거나 아무튼 뭔가를 할 때는 반드시 그 전에 마음이 먼저 합니다. 그걸 우리는 의도라고 말하기도 하고 충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내 안에 있는 감정에서 비롯됩니다. 즐겁다, 짜증난다, 화가 난다, 슬프다, 괴롭다 등의 감정이 충동이나 의도를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면 ‘밥을 먹어야 되겠다’는 의도는 배가 고프면 괴로우니까 그런 겁니다. 어느 순간인가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워요. 그리고 그 고통은 배가 고파서 생기는 것임을 오랜 경험에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고프구나 밥을 먹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감정이 충동이나 의도를 만들어 내고 그게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 감정이 좋은 감정이면 행복으로 이끌어 가지만 화가 난다, 슬프다, 우울하다, 짜증난다, 귀찮다 이런 나쁜 감정이면 마치 수레바퀴가 황소를 따라가듯이 그림자가 몸을 따라가듯이 괴로움이 따라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찰나의 마음은 다음 찰나의 마음의 조건이 되어서 다음 찰나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놔두면 계속 찰나 찰나 이어져서 눈덩이가 커지듯 더욱더 커져서 고통은 더 커지게 됩니다.

마음의 눈이 먼 것은 지금 여기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을 본다는 것은 바로 전 찰나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약간 불편한 느낌, 나도 모르게 살짝 짜증스러운 느낌, 설레는 느낌. 이런 감정들이 사실은 마음의 대부분입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사소하고 미미한 감정을 내가 놓치지 않고 잘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정적인 감정이 다음 찰나로 이어지지 않고 더 커지지 않게 됩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팝콘을 먹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큰 거 한 통을 다 먹었어요. 먹을 때마다 ‘내 손이 팝콘 통 속을 들어가고 있구나’ 이걸 내가 알아야 되는데 영화 보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그걸 모른 거예요. 그래서 계속 먹은 거예요. 짝구빨라 스님은 깨달음에 마음을 뺏겨 실제로 눈이 멀어버렸고, 구두쇠는 재물에 마음을 뺏겨 자식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마음을 뺏긴다고 할 때 그것은 사상일 수도 있고 깨달음일 수도 있고 재물일 수도 있고 이성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돈을 모아야 되겠다, 내 자식을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되겠다, 저 인간하고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을 해야겠다 등등. 이런 데에 마음을 빼앗겨서 지금의 내 마음을 못 보는 겁니다. 그 무언가에 마음이 뺏기면 지금 여기를 보지 못 해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한 찰나의 순간에 마음은 한가지 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찰나라는 말의 정의가 한 생각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받으면서 메모도 하고 짬짬이 TV도 볼 수 있는데 왜 그러냐고 할지 모르지만, 한 찰나는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현대의 시간 개념으로 말하자면 1/75초 정도 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육신의 눈은 보지만 마음의 눈이 그걸 보지를 못 해요. 지금 여기를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이야기에서 나오듯이 눈이 멀고 자식을 잃습니다. 지금 여기를 보지 못하면 고통이 따릅니다. 화가 나는데 즐거운 사람 있습니까? 화가 나는데 행복한 사람은 없어요. 화가 나면 고통스럽습니다. 물론 화가 날 때 마음대로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덜 고통스럽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못 합니다. 화가 나도 참아야죠.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은 반드시 고통을 동반합니다.

무언가에 마음을 뺏기는 것, 마음의 눈이 머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똑바로 살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의 내 마음을 보지 못하면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하려면 지금 여기의 내 마음을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행복하려면 지금 여기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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