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내 안의 침묵

2019. 6. 12. 수요법회

외국의 거리를 돌아다니면 현실감이 들지 않고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말도 알아 들을 수 없고 간판을 봐도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귀국행 비행기를 타자마자 대부분의 승객은 한국인이고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자연스럽게 주의가 가게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는 나도 모르게 내 주변 환경과 엮여있습니다. 가족이나 직장뿐만 아니라 보고 듣는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낯선 사회에 떨어진 이방인은 그 사회와 차단됩니다. 세계와 내가 차단되는 경험은 일상생활에서 나도 모르게 받는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를 풀어 줍니다. 단 며칠 동안 세상과 나를 차단해서 일상과 떨어져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런 상태를 굳이 표현하자면 침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침묵은 소리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소리, 옆에 앉은 사람들의 소리, 음악소리로부터 나를 차단하는 것이 침묵입니다. 침묵의 의미를 확장시키면 보는 것을 차단하는 것도 침묵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만드는 것, 내가 행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 역시 침묵입니다. 침묵은 소리로부터의 차단, 보는 것으로부터의 차단, 말하는 것으로부터의 차단, 행동하는 것으로부터의 차단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미국에서 15분 동안 아무 것도 없는 방 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참가자에게 정말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면 약간의 전기자극이 흐르는 부저를 누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참가자의 1/3은 전기자극 때문에 고통스럽더라도 부저 누르기를 선택했습니다. 전기자극의 고통보다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금붕어가 집중력을 유지하는 시간은 9초라고 합니다.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8초입니다. 인간이 금붕어보다 못합니다. 이것은 2017년에 한 실험의 결과이고, 2000년도의 같은 실험에서는 인간의 집중력이 12초였다고 합니다. 불과 십수년 사이에 사람들의 집중력이 금붕어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멍 때리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왜 침묵이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앞서 침묵은 나도 모르게 이 세상과 내가 엮여있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침묵이 중요한 이유는 침묵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내 밖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를 잠시 차단하는 일입니다. 바깥으로 나가는 이 마음을 잠시 중단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내 안에 있는 침묵과 만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굳이 참선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이런 것들을 느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축구선수가 골을 넣기 직전의 상황에서 그 축구선수의 내면에서는 경기장의 온갖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수의 모든 관심이 공에 가있기 때문입니다. 또 영화에서 싸우는 장면을 슬로우 비디오로 보여주듯이, 실제 상황에서도 모든 순간이 슬로우비디오로 전개됩니다. 그만큼 집중력이 엄청나게 강해집니다.

왜 특정한 순간에만 이런 일들이 생길까요? 평소 우리 마음은 항상 바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깥으로 분산되는 마음을 차단하면 엄청난 집중력이 생깁니다. 집중력이 너무 강하다보니까 주변의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평소에는 알아채지 못하는 미묘한 장면까지 모두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축구나 싸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방 스님들은 하루에 10시간에서 많게는 16시간까지 아무 것도 없는 방 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그게 참선입니다.

참선은 지관입니다. 그칠 지(止)에 볼 관(觀)을 씁니다. 지관에서 지는 뭔가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만 왜 한자로 ‘집중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친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집중을 하려면 밖으로 나가는 내 마음을 그쳐야 합니다. 그것을 그치면 자연스럽게 집중이 됩니다. 다음으로 관이라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눈으로 빛을 쏘는 게 아닙니다. 눈 뜨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상당히 수동적입니다. 즉 그치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평소 내 안의 세계, 침묵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은 바깥으로 마음이 달려 나가고 무언가 행동을 계속 취하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나가는 마음과 부질없이 계속하는 행동을 중지하면 고요한 내면의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난 침묵의 세계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와 내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은 다만 내가 보고 느끼고 듣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보는 이 풍경은 나 자신만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충격이 생기면 내가 만들어놓은 세계가 깨집니다. 익숙한 느낌이 사라져서 뭔가 달라 보입니다. 세계가 낯설게 보일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세상과 자신을 차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외국에 가면 말이 통하지 않고 글자를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와 세상이 차단됩니다. 보고 듣는 것들로 머리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보려고 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나만 둥둥 떠다니는 이방인 같고 투명인간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그런 감각이 한편으로 심리적인 해방감을 주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과 아는 풍경 속에 있을 때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 있지만 낯선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여행을 간다거나 심리적인 충격을 받는 일은 비일상적인 일입니다. 매일 여행을 가거나 매일 심경의 변화를 겪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나를 차단하는 것, 이것이 침묵입니다. 수행은 인위적으로 세상과 나를 차단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그런 시간을 일상생활 속에서 확보해야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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