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쌍봉마을
사자산문 개산조 철감선사 법호 ‘쌍봉’에서 유래
화순 이양면에 쌍봉리(雙峰里) 고을이 있다.
쌍봉리는 쌍봉마을에서 유래됐다. 그리고 쌍봉마을은 마을 위에 자리한 쌍봉사에서 시작됐다.
쌍봉사 이름에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온다.
하나는 쌍봉사의 주산인 중조산(中條山) 능선이 왼쪽으로 돌아 절을 에워싸고 우뚝 솟아 있어 마치 남북의 두 봉우리가 서로 읍(揖)하고 있는 것 같아 쌍봉사라 했다고 전한다.
또 하나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은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868)스님이 창건하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쌍봉은 도윤 스님의 법호이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도윤 스님은 소주 쌍봉사에서 정진하던 마음을 잃지 않고자 스스로 ‘쌍봉’이라 했다. 또한 쌍봉 도윤 스님이 신라로 귀국해 도량을 창건하고 쌍봉사라 했던 것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철감선사는 법도량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그러다가 오늘의 화순 이양면 중조산에서 발길을 멈췄다. 기이하게도 이곳의 산수가 남으로 나와 북으로 흘러가는(南出北流) 형세였다. 멀리서 용이 구름을 타고 하강하는 듯하고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 중국에서 정진하던 쌍봉사와 같았다. 장엄한 지세를 따라 산으로 올라가 보니 공부하기 좋은 수행도량이 나왔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실망한 철감선사가 부잣집에서 하룻밤 쉬어가게 됐다. 그런데 밤새 집안 식솔들이 부지런히 오갔다. 집안에 샘이 없어 멀리 냇가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다.
선사는 사찰이 들어서야 할 터임을 밝히고 산 아래에 자리를 잡아 우물을 파니 옥수가 솟아올랐다. 오늘의 쌍봉마을이다.
산 아래로 집터를 옮긴 부자는 철감선사가 쌍봉사를 세우는데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쌍봉사를 포근하게 안고 있는 주산은 계당산(桂堂山), 중조산(中條山), 또는 사자산(獅子山)이라 부른다. 쌍봉사는 배가 항해하는 형국(行舟形)이어서 절 입구에 삼층 목조탑(대웅전)으로 돛대를 높이 세웠다. 배에 구멍을 뚫으면 항해할 수 없으니 절에서는 함부로 샘을 파지 않았다. 다만 지형이 사자가 누워있는 형상으로 사자의 입은 침이 마르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침샘을 찾아 땅을 파니 맑은 물이 솟아났다. 수많은 대중들이 모여 수행하기 좋은 도량이 된 것이다.
쌍봉마을 앞에는 쌍봉천이 흐르고 마을입구 공원에 누각 ‘풍양정’이 자리해 있다. 쌍봉의 기운이 서려서인지 이 마을에서는 절의와 기개 있는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마을공원에는 의병장과 수많은 의병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마을 가장자리에 있는 학포당(學圃堂)은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 학포 양팽손(1488∼1545)의 독서당이다.
쌍봉마을 입구에 안내석을 살펴보니,
“쌍봉마을은 마을 앞에 육봉과 대산이 있어 쌍봉이라 했다는 설과 마을 주위의 산들이 쌍쌍이 있어 쌍봉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적혀있다.
마을 어디에도 쌍봉 도윤 스님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불교와 관련된 땅 이름 이야기가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듯하여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