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극락은 존재하는가?

극락과 사바세계

제사나 천도재를 지낼 때 극락왕생하시라는 말을 흔히 쓴다. 극락왕생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극락에 가서 태어나시라는 말인데, 극락에서 태어나려면 극락이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극락이 실제로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극락이 있다면 누가 극락에 가는가, 또 어떻게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극락(極樂)은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준말이다. 뜻을 풀이하자면 지극히 즐겁고 깨끗한 세상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극락을 금은보화가 넘쳐나고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근심걱정이 전혀 없고 항상 행복한 곳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전에서 묘사하는 극락은 그런 곳이 아니다. 극락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주 수월한 곳이다.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곳이 극락이다.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을 얻기가 힘든 이유는 여러 가지다. 경제적인 문제, 기아, 전쟁, 질병, 천재지변 같은 것들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두렵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극락은 그런 깨달음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다 사라진 세계이다. 수행하기에 좋은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에 누구라도 조금만 수행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정토, 즉 깨끗한 세상이 있으면 반대로 더러운 세상도 있다. 우리가 있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한다. 사바세계라는 말은 견디고 참는 세계라는 뜻이고 다른 말로는 예토(穢土)라 부른다. 예토는 아주 더러운 데다 고통과 질병과 위협이 많아 수행에 장해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토에 가려고 한다. 이 극락정토에 계시는 부처님이 아미타부처님이다.

극락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실제로 극락은 어디에 있을까요? 극락은 실재로 존재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극락이 확실하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극락에 가기 위해 노력할 텐데 극락이 없다면 극락에 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스님이나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극락이 있나보다’ 할 테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과학적으로도 극락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불교의 연기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어떨까?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는 것이다.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뿌리 깊은 착각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극락이 존재하는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며, 동시에 극락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극락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전에 극락이 어떤 곳이기에 극락을 강조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극락,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곳

극락은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누구나 극락에 가면 바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곳이 극락이라면 왜 아미타부처님이 극락정토에 계시는 것일까? <무량수경>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중생들이 내 나라(극락정토)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10번을 아미타부처님을 찾되, 만일 그래도 서방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정각(定覺)을 이루지 않겠다.”

아미타부처님은 중생들이 당신의 이름을 열 번만 생각하고 외우면 서방정토에 와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할 정도의 큰 자비심을 내어 반드시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원을 세웠다. 이것을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本願力)이라고 한다. 본원력이란 부처가 처음 발심할 때 세우는 가장 근본적인 원이다.

아미타부처님이 세운 원력은 나 혼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깨달음을 이루면 곧 중생들도 바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만큼 큰 이타심과 자비심이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에 녹아 있다. 아미타부처님 입장에서는 자리(自利),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깨달음 다시 말해 상구보리(上求菩提)가 곧 이타(利他),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다 서방정토에 가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 그것이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곧 모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것은 아미타부처님이 세운 본원력의 진실한 힘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그 힘을 믿음으로써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면 서방정토에 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서방정토가 어디에 있는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을 믿는 것이다.

부처님의 극락, 중생의 극락 

이처럼 아미타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 그 자체가 바로 극락이다. 그러나 중생들의 입장은 다르다. <관무량수경>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 귀의했던 빔비사라 왕이 물러나고 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아들이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도록 했다. 이때 빔비사라 왕의 왕비가 왕을 면회를 갈 때 몸에 꿀을 발라가니, 이로써 빔비사라 왕은 목숨을 연명했습니다. 이후 왕비는 부처님께 가서 한탄했다. “저는 이 세상이 너무 싫습니다. 아들이 남편을 굶겨 죽이려고 하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중생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바세계, 즉 예토는 너무나 살기 힘들다. 이런 곳에서는 깨달음을 얻기가 너무도 힘들기 때문에 하루빨리 이 곳을 떠나 극락정토에 나고 싶다. 중생들이 극락왕생을 간절하게 갈구하는 이유다. 

그러나 진리는 매우 심오하고 어려운데 아미타불을 열 번만 외우면 극락에 간다는 것은 얼핏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아미타불을 열 번만 찾으면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나무아미타불만 하면 극락에 간다는데…”

극락왕생을 갈구하는 정토사상은 죽음 특히 임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토사상은 죽음과 같이 극한 상황에 놓인 분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가르침이다. 지금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어느 세월에 화두를 들고, 어느 세월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겠는가? 일종의 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응급조치인 셈이다. 그러므로 어떤 순간에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열의를 가지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또 하나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영가님의 극락왕생을 바라면서 제사를 지낸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아주 수승하고 자비심이 넘치는 생각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이야기하기를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무조건 서방정토에 가는 것은 아니다. 

서방정토에 가려면 반드시 아미타불 염불을 해야 한다. 염불을 하면 서방정토에 태어나서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염불이 염불을 한다.’는 말이 있다. 지옥에 가기 싫다, 서방정토에 가고 싶다, 나는 중생인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일념으로 염불만 하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아미타불을 숭배하는 사상은 2천여 년 전 대승불교가 처음 생겨날 당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사람이 죽으면 내세가 있다는 영원불멸의 사상을 불교가 흡수한 결과이다. 시작은 내세를 갈구하는 사상으로 시작했지만, 불교가 발전하면서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을 진실하게 믿는 마음으로 염불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정토사상으로 승화되었다. 

제사를 지내거나 천도재를 지낼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 영가를 위한 제사는 산 자의 염불 공덕으로 영가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앉아서 듣기보다 함께 염불하며 스스로 수행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영가님이 지금 어디에 어떤 몸으로 계시는지 생각하기보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염불해야 비로소 제사를 지내고 천도재를 지내는 공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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