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약을 고르려는 이들에게

AI가 대답하고, 알고리즘이 선택을 대신하는 시대입니다. 제미나이와 챗GPT 없이는 업무를 이어가기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AI가 만들어낸 영상은 알고 봐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이기까지 합니다. 인공지능과 데이터의 그물망 속에서 인간은 편리함에 길들여져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자각마저 듭니다. 그 순간, 질문이 일었습니다. ‘진짜 현실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가.’ 문득 그 질문을 던졌던 영화 《매트릭스》가 떠올랐습니다.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진실을 보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이 담겨있는 작품이지요. 그 기억을 따라, 개봉한 지 스무 해도 넘은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빨간 약 vs 파란 약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배경은 아주 먼 미래, 인공 두뇌를 가진 컴퓨터(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AI는 인간의 뇌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주입해 사람들을 가상 현실에 가두어 놓습니다. 인간은 그 안에서 AI의 에너지원, 즉 배터리로 길러집니다. AI가 설계한 그 세계는 너무나 정교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환상 감옥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거짓된 꿈에서 깨어난 인간들이 있습니다. AI에게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인간으로 알려진 ‘모피어스’와 그와 더불어 AI에 맞서 싸우는 동료들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인류를 구할 구원자인 ‘그’를 찾아 헤맵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네오’입니다.
이후에는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유명한 장면이 나옵니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건네며 선택을 제안하는 장면이지요. ‘편안한 환상 속에서 배터리로 살 것인가’, ‘고된 길이더라도 진실을 찾아 인간답게 살 것인가’. 모피어스는 말합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네. 자넨 잠에서 깨어 일상으로 되돌아가 믿고 싶은 걸 믿으며 살면 돼.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게 될 걸세. 나는 토끼굴이 과연 어디까지 깊은지 보여줄 걸세. 명심하게. 난 자네에게 오직 진실만을 보여준다는 걸.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999) 중>”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입니다. 진실의 경계에서 모피어스가 한 질문이 구도의 길과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물음이 있지 않나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진실을 알고서 나로 바로 살고 싶은가요. 아니면 배터리로 살더라도 편안한 환상 속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의심의 시작과 수행의 결단
네오는 ‘내가 믿는 현실이 진짜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심 끝에 약을 골라 삼킵니다. 편안한 환상을 버리고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겠다는 결심이었지요. 진실을 바로 보겠다는 것은 단순한 용기가 아닙니다. 때로 진실은 원하는 해답이 아니라, 감당해야 하는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네오가 삼킨 빨간 약은 ‘단박에 깨달음을 주는 묘약’이 아니라 ‘무명의 장막을 걷어내는 약’입니다. 두 눈을 가리던 안개만을 걷어냈을 뿐, 그 이후의 길은 스스로 겪고 견뎌야 하는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네오가 약을 삼킨 후부터 벌어지는 장면과 대화들은 화려한 액션을 덧입은 수행자의 구도기처럼 느껴집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시다면, 영화를 보고 불교적 의미를 살펴보는 재미를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디지털 마야에서 벗어나는 방법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만든 매트릭스 속에서 살아갑니다. 수초마다 갱신되는 SNS 피드, 관계의 피로, 남과 나를 두고 끊임없이 비교하며 생기는 자책, 도파민에 중독돼 사유의 힘을 잃어버린 팝콘브레인(짧은 자극에만 반응하는 뇌 상태) 등등. 이 모든 것은 디지털의 이름으로 단단하고 거대하게 키워진 새로운 마야(māyā, 幻)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마야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역시 ‘진실을 보게 하는 약’을 삼켜야 합니다. 명상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약을 손에 쥔 셈이지요. 명상은 마음의 감옥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명상은 매트릭스를 부수는 폭력이 아니라, 그 안에서 깨어있는 연습입니다.
불자들에게 명상이란 더 이상 눈을 감지 않겠다는 결심이자,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 허상을 꿰뚫어 보는 힘이지요. 한 번이라도 마음의 매트릭스 밖에 있는 진실을 본 사람은 그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대자유가 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에요.
요즘 불자 명상 갈래잡기
이제 명상이라는 말은 너무나 다양하게 쓰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스트레스 해소의 도구이고, 다른 이에게는 자기 계발의 수단이며, 어떤 이에게는 수행의 과정입니다.
최근 명상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습니다. 앱을 통해 호흡을 배우고, 기업은 명상을 복지 프로그램으로 도입합니다. 명상이 마음의 평온을 위한 ‘서비스’로 소비되는 시대, 고요함을 파는 사업이 되었지요. 바쁜 일상의 피로를 잠시 달래주는 상품, 고통을 없애기 위한 기술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명상이 대중에게 가까워졌다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요즘 불자로서 고민하고 경계해야 할 부분은 깊이를 잃은 명상입니다. 불교의 명상은 고요함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기 위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고요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쉼터가 아니라 모든 번뇌와 마주할 용기를 키우는 자리이기 때문이에요.
‘명상하세요’, ‘마음을 비우세요’라는 문장 뒤에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왜 비워야 하는가’라는 근본의 질문을 잃지 않는 길이 요즘 불자로서 필요한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내면의 치열한 혁명’이 편안함만 추구하게 되는 순간, 그건 마치 빨간 약을 임에 물고도 삼키지 못한 채, 여전히 매트릭스 장막 안쪽에서 꿈을 꾸는 일과 같습니다. 진짜 명상은 불편함을 피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과 마주하지요. 명상은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문지방만 밟아도 그 공덕이 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매트릭스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한순간이라도 깨어있다면, 그 순간 그가 바로 주인공이 됩니다. 주인공이 되고자 붉은 약을 고른 분들의 여정을 함께 응원합니다.
* 2025년 1·2월호부터 11·12월호까지 여섯 번의 지면을 내어주시어, 명상의 본질적 의미와 역사, 전통 불교의 다양한 수행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부족한 여섯 번의 글을 끝까지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글. 유윤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