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지심귀명례

초하루법문, 2019년 1월 6일

예불은 가장 기본적인 종교의식이자 수행이다

불공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입니다. 사시(오전 9시~11시)에 올리는 불공을 사시불공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불은 새벽하고 저녁에도 합니다. 예불은 부처님께 예를 표하는 의식입니다. 예불과 불공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종교의식이자 수행입니다. 어느 종교든지 그 종교만의 종교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을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내가 하고 싶은 곳에서 종교의식을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나 혼자 그냥 해도 된다면 이 추운 날씨에 증심사까지 올 필요가 없습니다. 집에서 나 혼자 밥 먹고, 낮잠 자고 편하게 쉬다가, 심심할 때 소파에 앉아서, 혼자 염주 굴리면서 천수경 한번 읽고 끝내도 됩니다. 이것은 불교의식이 아니라 혼자서 내 수행하는 것입니다. 종교의식이란 정해진 때,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방식대로, 가능하면 정해진 복장으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기왕이면 여럿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불의 핵심은 칠정례입니다. 칠정례의 핵심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입니다. 지심귀명례라는 말은 지극한 마음으로 돌아가 목숨을 걸고 부처님에게 예를 표하는 겁니다. 한 번만 하고 말기엔 서운하니까 7번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갖추는 첫 번째 방법, 상대방을 높이는 것

그러면 예를 표하는 건 무엇일까요? 존경하는 사람에게 예를 갖출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높이거나 내 자신을 낮추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근데 우리 중생들은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잘 안 됩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습관이 되어서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를 표할 때는 상대방을 높이는 게 일반적입니다. 높이고 높이다 보면 신이 됩니다. 전지전능한 존재, 물과 불로 우리들을 심판하는 존재, 인간인 우리는 오로지 그의 뜻에 따라 그의 종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까지 대상을 올리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낮추지 않고 예를 표하려면 상대방을 신격화 시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왜 인간들은 부처님같은 위대한 존재를 신격화시킬까요? 인간 스스로 신이 되고 싶으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되돌아봅시다. 지금 21세기인데 이 지구상에는 사실 몇 개인지도 모르는 원자폭탄, 수소폭탄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불로 몇 십 번을 심판하고도 남을 양입니다. 우리가 신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반대쪽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하면 보통 사람들도 다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신입니다. 인간들은 신이 되고 싶어서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왜? 욕심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갖추는 두 번째 방법, 나를 낮추는 것, 하심(下心)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출 때는 나를 그 자리에 가만 놔두고 상대방을 올릴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서 예불은 부처님께 지극한 예를 표하는 것과 동시에 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고 합니다. 예불이 곧 하심입니다.

제가 출가하기 전에 친구와 함께 실상사에 놀러 간 적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법당을 들어가서 나한테 이런저런 설명을 하면서, 너도 삼배를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 때 내가 그랬어요. 내가 왜 삼배를 해야 되냐? 그냥 조각상인데 너나 해라 나는 안 하련다. 그 철불 앞에 둘이서 티격태격하다가 그 친구 혼자 삼배하고 나는 기분이 상해서 그냥 나왔습니다. 머리를 숙이는 거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존경하지도 않는, 심지어 사람도 아닌 조각상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하심은 몸과 마음이 함께 해야 한다.

우리가 예불을 할 때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는 이유는 내 자신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절에 좀 다니신 분들은 절을 하면서 ‘나는 지금 하심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만, 이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입니다.

송광사 행자들은 걸을 때도 차수를 하고 다녀야 되고, 얼굴 들고 다니면 안 되고, 항상 땅만 보고 걸어야 되고, 내가 먼저 무슨 말을 하면 안 되고, 누가 나한테 말을 걸면 단답형으로 대답해야 됩니다. 그리고 후원 밖으로 나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스님들은 둘째 치고 보살님들 근처에도 가면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행자로 몇 달을 살다 보니까 ‘내가 진짜 별 볼일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뭐 잘났다고 그렇게 설치고 다녔을까?’ 하는 반성이 뼈에 사무치게 들었습니다.

행자실에 왜 하심(下心)이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는지 그 때는 몰랐습니다. ‘왜 행자들 행동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조금만 못 하면 참회를 시켰을까?’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하심을 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심하라고 말로 해 봐야 못 알아들으니까 몸으로, 행동으로 하심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하심은 중생심을 없애는 수행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불할 때 가혹할 정도로 하심해야 합니다, 하심이 깊어지면 무심이 됩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땅 속으로 들어가면 보이질 않습니다. 아래 하(下)에 마음 심(心). 하심이 없을 무(無), 마음 심(心), 무심이 됩니다. 어떤 마음이 없어지는가 하면 바로 이 중생심이 없어지는 겁니다. 중생심은 뭡니까? 나는 잘났다는 생각이 중생심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할 겁니다. ‘내가 잘난 게 어디 있어. 이 나이 되도록 이루어 놓은 것도 별로 없고, 자식들 사는 것도 변변치 않은데 내가 하심할 게 뭐가 있어?’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다 내가 잘났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송광사 행자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하면 당장 불쾌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하심을 해서 낮추는 것은 우리들의 참 마음이 아니고 중생심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심이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불이 곧 수행입니다.

귀(歸), 본래 부처인 나 자신으로 돌아감

제가 출가해서 지금까지 새벽 예불 한 횟수를 따져보면 아마 몇 천 번은 될 것입니다. 그 수천 번의 새벽예불 중에서 강렬한 감동이 밀려오는 때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오랫동안 불자로 살아오셨으니까 다들 마음속에 그런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감동으로 가득 차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내가 부처가 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부처가 돼서, 부처로서 생각하고, 부처로서 행동하고, 부처로서 절하고 말하는 그 순간, 나는 중생심을 잠깐 잊어버립니다. 영원히 잊어버리면 부처가 되는데,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1초, 길면 15초 정도 잠깐 잊습니다. 이 법당이 내 자신으로 꽉 차는 듯한 감동, 부처님과 내가 한 몸이 되는 듯한 환희.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부처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길어지고 길어지면 바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이런 이야기 입니다. 원래 우리는 다 부처인데 무명에 정신을 뺏겨서 중생심을 키운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 부처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간다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생활불교의 길

구산스님의 “생활불교의 길” 첫머리에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멋에 산다”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는다면 제대로 하심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불교의 길” 머리말을 다함께 합송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我]란 멋에 살건마는, 이 몸은 언젠가는 한줌 재가 아니리. 묻노라 주인공아, 어느 것이 참 나런고? ‘나’란 정의와 한계와 가치를 알고 올바른 길을 택하여 진실한 희망의 길로 갑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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