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속이야기

코앞의 죽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환하던 미소와 따뜻한 음성이 멈추었다. 싸늘하게 식은 볼을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쏟았다. 죽음,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늘 곁에 있지만 끝내 외면하고 싶은 그 손님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수행자가 항상 마음에 두고 되새겨야 할 여섯 가지[六念法] 가운데 ‘염사(念死)’가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씀하셨다. 

수행자는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이 몸은 남이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스스로 죽는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이런 유위법(有爲法)을 두고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만큼이라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늙지 않아도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것이 이 몸이다. 그러니 재앙 덩어리인 이 몸을 붙잡고 온갖 근심과 고뇌를 품어서는 안 되며, 편안하게 천년만년 살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그런 마음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일으키는 것이다. 숨을 내쉬면서 다시 들이마신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숨을 들이마시면서 다시 내쉰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잠자리에 들면서 다시 깬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무엇 때문인가? 안팎으로 이 몸을 노리는 적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 태 속에서 죽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고 

어떤 사람은 늙어서 죽네  

과일이 익었을 때 

갖가지 인연으로 떨어지듯이.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아무리 위엄과 덕이 높은 사람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죽음을 벗어나는 자 없네.

달래고 뿌리쳐도 소용없고 

사정하고 부탁해도 소용없고

공격하고 방어하며  

죽음을 피할만한 곳도 없네.

청정한 계율을 지킨다고 될 일도 아니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죽음은 인정사정없는 도적 

그가 닥치면 피할 곳이 없네. 

그러니 수행자는 무상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이런 몸을 믿고, 계속 살아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죽음을 깊이 고찰하도록 가르치신 것과 같다. 

어느 날 한 비구가 가사를 한쪽으로 걸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제가 죽음을 고찰하는 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그래, 죽음을 고찰해 보니 어떻던가?” 

“저는 이제 7년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게으름을 떨었구나.”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비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목숨이 7개월만 남았다 해도 불만이 없습니다.”

“너도 게으름을 떨었구나.” 

곁의 비구들이 경쟁하듯이 너도나도 말하였다.

“저는 목숨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엿새요.”

“저는 닷새요.”

“저는 나흘요.”

“저는 사흘요”

“저는 이틀요.”

“저는 내일 당장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역시 죽음을 제대로 고찰하지 않고 게으름을 떨었구나.”

그러자 한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를 한쪽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합장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저는 이제 숨을 내쉴 때 다시 들이마시기를 기대하지 않고, 숨을 들이마실 때 다시 내시기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환하게 웃으셨다. 

“네가 게으름 떨지 않고 제대로 수행하였구나.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찰나 찰나 생겼다 사라지면서 아주 잠깐만 머문다. 지혜가 없는 자들은 환상과 같은 그것에 속는다.” 

그 옛날, 자로(子路)가 죽음에 관해 묻자, 공자님께서 “삶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며 자로를 꾸짖으셨다고 한다. 물론 ‘죽음’보다는 ‘삶’에 주목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감히 성현이신 공자님 말씀에 반론을 제기할 뜻은 없다. 하지만 공자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네가 삶을 제대로 안다면 죽음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리라.” 

또 죽음에 대해 깊이 고찰하도록 권유하신 부처님 말씀도 이렇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죽음을 제대해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저절로 알게 되리라.”

삶과 유리된 죽음, 죽음과 유리된 삶, 그런 것은 없다. 만약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허상(虛相)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하는 것이고,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는 단편들이다. 이것이 실상(實相)이다. 이를 망각한 채 살아가고 죽어가면 어리석은 중생이고, 이를 명확히 자각하면서 살아가고 죽어가면 성현이다.  

화장터에서 뜨거운 불길에 남은 어머니의 유골을 받아들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무엇일까?” 

삶, 언제든 멈출 수 있다. 사람들이 붙잡고 애지중지하는 것 가운데 자기 목숨만 한 것이 있을까? 목숨이 당장 멈출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과연 무엇을 그만둘 수 없을까? 지독한 사랑? 원대한 목표? 자다가도 이가 갈리는 원한? 그까짓 것쯤이야! 

글. 성재헌(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 / 일러스트. 박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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