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간의 길을 따라가다: 쌍봉사, 보림사, 무위사
흩날리는 산벚과 투명하게 빛나는 연둣빛 새싹이 온 산을 물들였습니다. 이 계절 남도의 아름다움을 무어라 더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일 년 반 만에 다시 시작하는 길따라절따라 불교문화답사의 시작을 봄빛으로 열어냅니다.
답사팀은 4월 13일 남도의 천년고찰 세 군데를 탐방했습니다. 화순 쌍봉사, 장흥 보림사, 강진 무위사입니다. 광주 지근거리에 계시는 증심사 불자님들에게 이들 사찰은 언제든 갈 수 있는 흔한(?) 절일 수도 있겠지만, 불교문화적 가치로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도처에 자리한 국보와 보물이 천 년 넘는 시간 동안 부처님 도량으로써 역할해온 역사를 증명합니다.
길따라절따라 불교문화답사는 단순히 부처님 전에 가서 기도하는 성지순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불상을 세세하게 뜯어보고 면밀하게 관찰하는 학습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언제, 누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나를 공부하다보면, 역설적이게도 ‘불상(佛像)’ 아닌 ‘부처님’으로 다가옵니다. “마땅히 공양과 존경을 받을만한 분”임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철감선사의 숨결을 따라 화순 쌍봉사
사찰 입구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고즈넉한 대웅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웅전이라지만 형태는 탑에 가깝습니다. 경주 황룡사지 9층 목탑이나 일본 교토에서 만날 수 있는 백제식 목탑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3층 목탑의 모습을 전하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0년대 소실된 후 복원되었습니다. 지장전에는 보물인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쌍봉사의 하이라이트는 경내에서 벗어난 대나무숲 너머입니다.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자산문의 종조, 철감선사를 기리는 탑과 탑비가 있습니다. 국보인 철감선사탑은 통일신라시대 부도 중에서도 조식이 화려한 걸작입니다. 하대석의 구름무늬와 상단의 사자상은 마시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합니다. 상대석 앙련 위에는 날개 달린 가릉빈가가, 탑신을 받는 부위에는 연꽃무늬가 둘러져 있습니다. 여덟 면의 탑신에는 문, 사천왕상, 비천상 등이 조각되어 있는데 보존상태가 아주 훌륭합니다.
탑과 함께 만들어진 탑비는 보물니다. 오른쪽 발을 살며시 들고 있는 거북의 형상은 역동적이고, 용의 형상을 한 머리는 해학적입니다. 거북이 등딱지인 귀배의 무늬가 선명하지요. 안타깝게도 비신은 없고, 탑비의 꼭대기 부분인 이수만 남아 귀부 위에 바로 얹혀있습니다.
통일신라 최초의 구산선문 장흥 보림사
‘왕즉불’의 시대, 통일신라에서 왕만 부처가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본래 혁신적인 면모가 부각됩니다. 불교 선종과 지방 호족이 만나 구산선문이 차례로 개창합니다. 그 처음이 가지산문 보림사입니다. 보림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온 해동선종의 종찰입니다.
외호문을 지나서 만나는 사천왕상은 151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목조 사천왕상으로는 유일하고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사천왕이기도 합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탁 트인 마당을 가로질러 남북 3층석탑과 석등을 마주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우아하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걸작입니다.
남북 3층석탑 뒤에는 대적광전이, 그 안에는 철로 만들어진 부처님이 계십니다. 국보 철조 비로자나불좌상입니다.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유행했던 양식이라고 하는데, 높이 2.5미터의 철불을 만드는 데에 쇠 2,500근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웅보전 오른편에 위치한 보물 보조선사탑비와 보조선사탑도 참배합니다.
조선의 정적(靜寂) 속으로 강진 무위사
여정의 끝은 강진입니다. 무위사는 극락보전입니다. 세종 12년 효령대군의 시주로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극락보전이 지어졌습니다. 극락보전은 건물 자체로 국보입니다. 조선 전기 건축으로, 단아하고 정제된 구조가 인상적입니다. 앞모습도 좋지만 오후의 햇살이 뉘엿뉘엿 내려앉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묘한 쓸쓸함과 안도감이 생겨납니다. 중현스님은 “언젠가 인생이 힘들 때, 현실의 괴로움에 쫓길 때, 무위사 극락보전에 와서 위로 받으라”고 말합니다.
성종 7년에는 극락보전 안에 아미타여래삼존벽화가 그려졌습니다. (탱화가 아니라 벽화입니다.) 국보입니다. 후불벽 뒤편에 그려진 보물 백의관음도는 우리나라 관음도 중 가장 오래된 수작으로 손꼽힙니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 내벽사면벽화 모두가 보물입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곧 해체보수에 들어갑니다. 내부의 불보살님들은 성보박물관으로 이운될 것이고, 외부 건물도 가림막에 가려질 것입니다. 답사팀에게 가피가 함께 한 모양입니다. 해체보수 전 거의 마지막 참배일 것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