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운명을 믿습니까?

만약 모든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미래를 알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 미래를 내다보는 점괘가 나쁘다고 하면 살아있는 내내 불안하게 살아야 하고,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으면 시큰둥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굳이 힘들게 미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가 미래를 미리 알아서 바꿀 수 있다면, 미래는 결정된 것일까요?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그 무엇도 결정된 것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전제와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반면 결정된 미래가 없다고 가정하면 어떨까요? 결정된 미래가 없다는 말은 곧 시간의 선후관계에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우연히 모든 일이 생긴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미래를 알 수도 없을뿐더러, 굳이 미래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노력해서 미래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결정된 미래가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결정론에 입각해서 보면 미래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모든 것이 우연이어서 결정된 미래가 없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신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결정된 미래가 있건 없건 우리는 미래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됩니다.

운명에 대해서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데, 왜 사람들은 운명을 찾을까요? 예를 들어서 여름이 가고 나면 가을이 온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예측했다고 해서 용한 점쟁이라고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내일 오후 3시 스타벅스 종로점에서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카페라떼를 시킬 것이다’라고 예측했다고 칩시다. 설령 그게 맞다고 해도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몰라도 아무 상관없는 미래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운명을 찾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설령 나와 관련된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통제 가능한 범위에 들어 있는 나의 미래는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가령 ‘오늘 저녁에 사형 스님들과 저녁을 먹을 것이다. 왜? 약속이 되어 있으니까.’라는 사실은 통제 가능한 나의 가까운 미래입니다. 이런 것은 운명이라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반면 ‘내일 짝사랑하는 남자와 저녁을 먹을 것이다’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녁을 먹는다는 것은 앞의 예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여성은 남자를 짝사랑하기 때문에 남자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짝사랑하는 남자와 저녁을 먹고 싶다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이 여성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이 경우,
이 여성이 희망하는 미래는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은 자신의 희망이 정말로 실현될지 궁금한 것입니다. 점쟁이를 찾아가 ‘그와 잘 될 수 있을까요? 내일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겁니다. 점쟁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죠.

이렇듯 나하고 관련된 일인데 내 통제 범위를 벗어난 경우에 인간들은 미래를 궁금해 합니다. ‘내 딸이 시험에 떨어질까 붙을까?’, ‘군대에 있는 아들이 건강하게 있을까?’ 이것들은 나와 관련되어 있지만,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사안입니다. 이런 경우에 미래를 궁금해 하는 것은 어떻게든 나의 통제 범위 안에 내가 원하는 미래가 들어오게 하려는 마음의 발로입니다. 한마디로 욕심이지요.

운명을 찾을 필요도 없고 찾을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된 미래를 갈구하는 이유는 욕망과 현실 사이에 놓인 큰 간격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와 내가 원하는 미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간극을 메우고 싶은 마음이 내가 원하는 데로 결정된 미래를 갈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신뢰하는 사람이 내가 원하는 미래를 보장해주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에 힘입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을 수 있습니다. 운명론적인 생각을 하는 것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본질은 우리의 욕망,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라는 삶의 동력 때문입니다. 다만 욕망과 욕망에 따른 보상으로서의 쾌락을 구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욕망과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운명적 믿음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근거 없는 믿음, 운명에 대한 믿음을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전망으로 바꿔야 합니다. 한마디로 욕망을 의지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새로 사업을 시작하면 어떻게든 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사업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업이 술술 잘 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만 믿고 맨날 놀기만 한다면 사업이 잘될 리가 없습니다. 성공하려면 고민하고 연구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사업 성공에 대한 욕망이 의지가 될 때 욕망의 실현 가능성도 커집니다.

어느 해인가 엄청나게 가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안거를 지내는 스님들끼리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마을의 면장이 절에 올라와 주지스님을 찾아뵙고는 절에서 기우제를 지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절의 입장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비가 안 오면 체면을 구기는 것이고, 그렇다고 면장까지 올라와서 부탁하는데 박복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주지스님께서는 기우제를 지내겠노라고 약속하고, 기상청에 연락해서 비가 올 확률이 높은 날짜를 받아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실제로 기우제가 끝날 무렵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기우제를 지내니까 비가 온 것입니다.

요즘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우제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혹시나 하는 희망 때문입니다. 당시 주지스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욕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조금이나마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실제로 실천한 것입니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알기만 할 뿐 아니라 실현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방법을 찾는데 그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운명을 믿고 따르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입니다. 오늘은 운명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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