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웅
2019년 4월 21일 증심사 일요법회
현대의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인간이 진화해 온 수백만 년 동안 일관된 정치적 단위는 자급자족하며 독립적으로 살았던 자율적인 소규모 공동체였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위계적이고 조직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국가들은 장구한 인류사에서는 대단히 희귀한 현상으로 불과 6,000년 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 조지프 테인터 <문명의 붕괴>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해코지를 하면 경찰이 출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잡한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살아도 문제가 없도록 국가와 법이 규제하기 때문에 현대인인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 섞여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명사회이고,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지프 테인터에 따르자면 지금의 이 문명사회는 지극히 비정상입니다.
얼마 전 진주에서 조현병을 앓는 사람이 같은 동네 사람을 묻지마 살인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뉴스에서는 국가가 정신질환자를 방치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국가의 관료행정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한 결과라고 합니다. 경찰은 병원으로 책임을 돌리고, 지자체에서는 미등록자를 관리할 수 없다고 하고, 병원에서는 환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는 방치되었고, 그 결과 증세가 심각해져서 문제를 일으킨 것 역시 사실입니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의 책임 방기로 결론이 납니다.
어쨌든 사회의 불안요소는 사회로부터 격리를 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고 누가 판단하냐는 겁니다. 이것은 제도적으로 규정하기가 애매한 부분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제도적 한계를 기술의 발전으로 보완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컴퓨터 프로그램 상으로 그동안의 범죄 데이터를 분석해서 우범 시각이나 장소를 특정하여 경찰을 집중 배치해 범죄 방지 효과를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습니다. 특정 지역, 특정 시간에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설령 그것이 오해라 할지라도 경찰에게 총을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뭔가 문제가 있으면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넣습니다. 청원자가 일정 수를 넘으면 정부는 반드시 청원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합니다. 정부로 하여금 슈퍼맨, 슈퍼히어로가 되라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영웅은 태생적으로 강력한 능력이 있고, 이타적이면서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사회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사회의 불안요소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이를 뛰어난 능력으로 제거하는 사람입니다. 영웅 시리즈는 영화의 오랜 단골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회는 영웅을 원합니다.
제도와 법, 나아가 기술로 작동하는 국가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왜 이 사회는 영웅을 원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각 개인이스스로나서기싫기때문입니다. 개인은힘이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힘이 없으니까 내가 할 수는 없지만 평화롭게 살고 싶어.’ 라고 개인들은 이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이타적인 존재가 내 욕심을 채워주기를 바랍니다. 영웅이 등장하는 이면에는 우리 같은 선량함과 동시에 이기적인 개인들이 있는 겁니다.
불교에서 영웅과 가장 비슷한 존재는 무엇일까요? 바로 불보살님들입니다. 불보살님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교화하여 그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인도합니다. 부처님은 앙굴리마라 같은 살인자도 제도하여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다른 제자들이 엄청나게 싫어하고 구박했지만 앙굴리마라는 참회하고 또 참회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부처님처럼 살인마를 교화하기보다 당장 내 눈앞에서 속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입니다. 불보살이 아니라 영웅을 원합니다. 우리들이 너무도 이기적인 탓입니다.
영웅도 불보살님도 없는 세상에서 우리 같은 이기적인 중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요?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삶의 양식은 비교적 원시적인 아프리카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도반 스님이 조계종에서 지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농업학교에 가서 지낸 적 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도둑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둑이 마을 사람들에게 잡혔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경악할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을의 문제는 마을에서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지요. 정말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마을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고, 누군가 부모 없이 힘들게 산다면 온 마을이 나서서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현대 문명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많은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서 조지프 테인터가 말한 ‘자율적인 소규모 공동체’는 아마도 바로 이런 마을일 것입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마을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은 한계가 있습니다. 앞서 아프리카의 마을 같은 일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다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서 언급했듯, 법과 제도로 움직이는국가가모든해결해줄수도없습니다.국가와 소규모 공동체가 서로 보완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먼저 이미 와해된 공동체가 복원되어야 합니다.
이미 무너진 공동체를 복원하려면 어느 정도의 희생과 양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도시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 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나도 타인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누군지 알 리 없습니다. 심지어 옆 집 사람조차 내가 누군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익명성은 개인을 보호하는 주요한 장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의 익명성에 너무 취해버리면 공동체를 복원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프라이버시는 포기해야 합니다. 희생하고 감수하고 공동체를 책임질 수 있어야,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습니다. 진주방화사건 같은 경우, 내 일이 아니라고 방치했기에 일이 커진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은 알게 모르게 이기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늘 ‘우리가 부처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자’, ‘부처님의 행을 하자’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이타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이기심을 조장하는 사회 속에서 이타적으로 살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개인으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각자가 이타적인 모습을 가질 때에 비로소 우리 사회는 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