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산막동 보화마을
스님이 알려준 땅에서 나온 금덩어리의 주인은?
조선시대 광주에서 ‘기(奇), 고(高), 박(朴)’씨는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이들 집안과 혼사 맺기를 원했던 것은 학문이 높고, 의리를 지키며, 인품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광산구 어등산에서 황룡강을 따라 북으로 향하면 판사등산 아래에 월봉서원이 있다. 퇴계 이황과 조선 최대의 논쟁을 벌인 고봉 기대승(1527-1572)을 추모하는 서원이다.
월봉서원을 앞두고 15리(6km)쯤에 보화촌이 있다. 보화촌은 어느 신심 깊은 농부 불자 이야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광산문화원 지명유래에 전하는 보화촌 이야기는 이러하다.
선조 후기 1780년경까지 외지인들이 모여산다 하여 외촌(外村)으로 불렸다. 1775년경 산막동 보화촌에서 조금 떨어진 본량면 산수리 마을에는 성실하기로 소문난 여양진이 살았다. 여양진은 불심이 깊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불경을 읽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어느 따듯한 봄날, 여양진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스님 한 분이 밭 앞을 지나갔다. 처음 뵙는 스님이지만 여양진은 일을 잠시 멈추고 스님을 향해 합장을 했다. 이에 스님도 합장을 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가 되어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밭일을 하는데 스님이
바랑에 시주를 받아 돌아가고 있었다.
여양진은 ‘자신도 시주를 하고 싶지만 할 게 없어 죄송하다’고 했다. 스님은 ‘괜찮다’며 다음에 오겠다 하고 떠났다. 여름이 되어 보리농사를 성실하게 지은 여양진은 보리를 수확했고, 보리쌀 한 자루를 시주하려고 스님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이 여양진 집을 방문했다. 여양진은 보리쌀을 시주했다. 보리쌀을 받아든 스님이 “혹시 다른 곳으로 집을 옮길 의향은 없는지요?”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스님은 얼마 전에 봐둔 곳이 있는데, 여양진이 성실하게 농사를 잘 지으니 거기서 농사를 지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당장 그 땅을 보러 갔다. 그곳이 오늘의 광산구 산막동이었다.
높지 않은 언덕에 갈대가 넓게 퍼져 있었다. 그렇게 여양진은 산막동에 정착했다. 산막동에서도 여양진은 예전과 다름없이 억새로 우거진 황무지를 일구고 밭으로 만들어 씨앗을 뿌렸다. 억새밭을 농지로 개간하는데 기쁨이 있었다. ‘내년에는 조금 더 넓게 심어야겠다!’ 하며 억새를 베고 괭이로 밭을 일구던 여양진은 괭이 끝에 뭔가 닿는 느낌이 들어 다시 한 번 더 힘껏 괭이질을 했다.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여양진은 돌멩이와 부딪치는 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헤쳐 주먹 크기의 물건을 꺼내 흙을 털자 금덩어리가 보였다. 억새밭에 금덩어리가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양진은 스님이 알려준 땅에서 나온 금덩어리니 자기 것이 아니고 부처님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금덩어리를 시주하기 위해 절을 찾아 떠났다. 이후 여양진이 가꿔놓은 밭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주해와서 살았고, 주변 마을에서는 금은보화를 얻은 곳이라 해서 이곳을 보화촌(寶貨村)이라 불렀다.
부처님에 대한 불심과 성실한 노동, 착한 심성이 복을 내린 것이다. 그 복을 자신의 덕으로 받았다고 생각지 않고 다시 부처님의 덕으로 돌리는 착한 마음씨를 지닌 여양진이 일구어놓은 밭이야말로 금덩어리보다 귀한 보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