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 징광리 2
징광사, 부처님 가르침 활자로 새긴 문자
포교 성지 보성 징광리 땅이름의 유래가 된 징광사는 한국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출판문화에도 큰 획을 그었다. 남도에서 송광사 다음으로 가장 많은 불서를 간행한 불서출판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출가한 스님들이 계를 받고 강원이나 승가대학에서 처음 접하는 교과서가 <치문(緇門)>이다. 송광사로 출가한 백암 성총(佰庵性聰, 1631~1700)스님이 치문에 주를 달아 후학들의 지침서가 되도록 했다. 바로 그 성총스님이 징광사에 주석하며 수많은 불서를 발행했던 것이다.
지금부터 330년 전인 1681년(숙종 7년), 큰 태풍이 불어 일본으로 가던 중국 상선 하나가 신안 임자도에서 난파되었다. 배에 실렸던 불서는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약 100년 간 절강성을 중심으로 간행됐던 최초의 방책본 대장경으로 중국에서 간행된 역대 대장경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을 담은 궤짝이었다. 그 소중한 경전들이 임자도 부근에서 태풍을 만나 흩어지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경전이 바다 위에 산질(散帙)되어 떠다니다가 바닷가 어부와 섬에 사는 목동 손에 들어가 창호지나 방 흙벽을 바르는 종이로 쓰였다. 이때 영광 불갑사에 머물던 성총스님이 태풍에 흩어진 경전 이야기를 들었다. 다급히 임자도로 향한 성총스님은 임자도 인근에서 9년간 머물며 경전 190여 권을 수집했다.
수집하고 보니 듣기만 했던 명나라 평림거사의 <화엄경>과 이를 해석한 <소(疏)>, 상세하게 해석한 <연의초(演義鈔)>를 합쳐놓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 隨疏演義鈔)> 일부를 접하게 됐다. 마침내 1690년 그동안 모은 경전들을 가지고 보성 징광사로 돌아와 경전을 목판에 판각해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세상에 폈다. 성총스님은 보물 같은 경전을 더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징광사에서 15년간 5,000여 개의 목판에 일일이 새겼던 것이다. 이로써 징광사는 불교경전 출판성지가 되었다.
당시 징광사는 한지를 생산하고 판각하는 각수(刻手)들이 있었다. 소중한 경전을 얻은 성총스님은 자신만이 간직하기보다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본격적인 경판 불사에 들어갔다. 종이를 생산하고 경판을 새기는 불사는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성총스님은 오직 부처님 말씀을 널리 펴고자 발원하고 불사를 감행했던 것이다.
성총스님은 징광사에서 <정토기신문> <권수정토지업> <염불요문> <불시염불심종공덕> <일과염불> 등 정토신앙과 관련된 내용을 편집해 정토입문서인 <정토보서(淨土寶書)’를 펴냈다. 또한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관음경>과 관련된 송·명·청대의 영험담을 수록한 <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도 판각해 유포했다. 아울러 화엄에 조예가 깊은 성총스님은 <화엄경> 관련 불서보급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징광사는 성총스님 이후에도 경전을 간행했고 제작한 화엄경 판본 80권을 보관하고 있었다. 화엄관련 불서로 당나라 징관의 <대방광불화엄경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抄)>를 1690에 제작 보급했다. 그후 해인사 장경각에 있는 팔만대장경 판본을 찍어 징광사에 봉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770년 징광사 화재로 판목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화엄학의 대가인 설파 상언스님이 80권에 달하는 화엄경 판본을 줄줄이 외워 다시 판각하게 된다. 설파스님의 비상한 암기력은 염불의 힘이었다. 스님은 말년에도 매일 염불을 1만독씩 10년 넘게 독송하며 정진했다.
큰 스님들의 용맹정진과 불서보급으로 한국 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징광사는 이제 절이 있었던 터만 남아 황량하기만 하다. 누군가 눈 밝은 이가 있어 그곳에 가면 불서출판의 흔적이라도 만날 수 있도록 복원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