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품은 진주 청곡사와 진주성 전투
올해부터는 주지 중현스님의 해설과 함께 사찰 및 지역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답사를 진행한다. 5월 18일 진행된 길따라절따라에는 24명이 참석해 청곡사와 진주성을 다녀왔다. 진주로 향하는 동안에 진주성 전투와 관련된 영상을 시청하고, 주지스님이 청곡사 관람 포인트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답사 날 청곡사 대웅전에서 부처님 좌대를 수리해 참배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업경전에서 재를 지내고 있어 전각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잠깐 살펴봐 아쉬움이 남았다.
청곡사
학과 신덕왕후의 전설이 있는 청곡사
올해부터는 주지 중현스님의 해설과 함께 사찰 및 지역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답사를 진행한다. 5월 18일 진행된 길따라절따라에는 24명이 참석해 청곡사와 진주성을 다녀왔다. 진주로 향하는 동안에 진주성 전투와 관련된 영상을 시청하고, 주지스님이 청곡사 관람 포인트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답사 날 청곡사 대웅전에서 부처님 좌대를 수리해 참배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업경전에서 재를 지내고 있어 전각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잠깐 살펴봐 아쉬움이 남았다.
조각상으로는 유일한 목조제석천과 대범천의상
경상남도에서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청곡사 대웅전 안에는 부처님, 탱화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목조제석천과 대범천의상을 주목할 만하다. 원래는 업경전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로 탱화에서 많이 보이는 제석천과 범천이 따로 조각되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청곡사가 유일하다. 그래서 이름이 의상(倚像)이 들어간다.
독특한 보물이 가득 담긴 업경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다른 사찰에 비해 둥근 얼굴에 아이 같은 상호를 하고 있다. 또한 신체에 비해 머리를 크게 제작해 3등신이라 더욱 귀엽게 느껴진다. 반면에 인왕상은 큰 괴목에 조각되었다. 주먹을 움켜쥐어 신체의 생동감과 위용이 느껴진다.
진주성
진주성과 임진왜란
진주성은 1592년 임진왜란 진주대첩 당시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이 군사 3,800여 명을 이끌고 왜군 2만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몇 개월 후 2차 진주성 전투에선 왜구가 조선군과 백성 7만을 몰살한 아픔이 있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의병 중 2/3가 호남에서 온 의병이라 한다. 주지스님은 “다큐를 보면서 느낀 점은 1차 전투에서는 김시민이란 좋은 지도자와 관민이 합심해서 승리했고, 2차 전투는 지도자의 부재와 남은 지휘자들이 합심하지 못해 패했던 것 같다”며 “역사는 돌고 돈다”고 설명했다.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2대 누각으로 알려진 촉석루는 6.25전쟁 당시 모두 불타 1960년대에 재건했다. 가리는 곳 없이 탁 트여 남강을 삼면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누각 안에는 전쟁 때 지휘본부대로 사용해 남장대(南將臺)란 현판이 남강을 바라보는 곳에 크게 걸려있다.
논개와 의기사
논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기사는 임진왜란 후 150년 후 영조가 하사했다. 논개의 제사를 지낼 후손을 찾을 수 없어 진주 관기들이 제사를 지냈다. 일제강점기 때 관기제도가 없어진 후에는 잠시 명맥이 끊겼다가 1960년대부터 진주시 여성단체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예전 논개의 초상은 친일화가가 그렸다는 논란으로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는 새로운 표준영정으로 그려져 있는 초상이 걸려있다. 논개는 역사적인 사실이 거의 없어 아직 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주지스님은 “개인적으로는 2차 진주성 전투에 서 패배한 사대부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한 여인의 스토리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