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당시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과 듣지 않은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시기를, “비구들이여, 아직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받으면 비탄에 잠기면서 매우 혼미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난 뒤에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반대로 이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받아도 쓸데없이 비탄에 잠겨 혼미하게 되지 않는다. 그것을 나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괴로운 느낌’이 첫 번째 화살로 인한 상처입니다. 그 후에 ‘쓸데없이 비탄에 잠겨 혼미하게 된다는 것’이 두 번째 화살로 인한 상처가 됩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상처가 난 경우,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면서 내 몸에 가해진 운동에너지가 첫 번째 화살이요, 긁히고 피가 난 것이 첫 번째 상처입니다. 두 번째 상처는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파상풍이 걸린다거나, 간지럽다고 마구 긁어 상처가 덧난 겁니다. 두 번째 화살은 세균 또는 긁는 행위입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다친 상처는 마음의 상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상처는 어떤 것일까요? 예를 들어서 나와 가까운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가 나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닌다고 합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배신감을 느끼고 화도 날 것이고 세상 살 맛도 안 날 것입니다. 그럴수록 친구를 볼 때마다 어색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 때문에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자괴감도 들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첫 번째 화살은 무엇입니까? ‘말’입니다. 말 그 자체는 기분 나쁜 말도 없고 기분 좋은 말도 없습니다. 말 안에는 화가 나거나 슬프다는 속성이 없습니다. 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말이라는 것이 그릇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감정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첫 번째 화살은 말 그 자체입니다. 첫 번째 상처는 첫 번째 말을 듣는 순간 드는 놀라거나, 황당하거나, 괴로운 느낌일 것입니다.
두 번째 상처는 무엇입니까?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고 자괴감이 들어서 괴로운 것이 두 번째 상처입니다. 똑같은 말인데 어떤 말은 불쾌한 감정이 들게 하고 어떤 말은 나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왜일까요? 말은 그냥 말일 뿐인데, 내가 그 말에 대해서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는 겁니다. 감정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화살을 쏜 것은 누구입니까? 첫 번째 화살을 맞고 스스로 ‘틀렸다, 싫다, 나쁘다’라며 마음대로 시비를 가렸습니다. 그러자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네가 어떻게 내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생각이 또 따라옵니다. 중생들은 첫 번째 화살과 상처를 두고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아름답다, 추하다같은 판단을 덧칠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이며 이것은 내가 만든 겁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에 첫 번째 화살을 맞으면 99.9%는 스스로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쏩니다. 두 번째 화살이 만들어낸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마음은 화가와 같다는 것을 알고 내가 그린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내가 만든 것과 나의 밖에서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화가는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그리고 자기가 그린 세상에 심취합니다. 마음도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그립니다. 그런데 카메라는 다릅니다.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두 번째 화살을 피하려면, 카메라가 사진을 찍듯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출발점은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인가 첫 번째 화살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구별만 해내면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치료되는데 구별하기가 힘듭니다. 화가 났을 때 ‘참아야지, 참아야지, 내가 그래도 불자인데 참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화를 억누르는 것이지 치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또 다른 화살을 쏘는 행위입니다.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첫 번째 화살인지 두 번째 화살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러자면 우선 내 감정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화가 나는 상황이라면 화가 나는 내 마음 속 풍경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꼼꼼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는구나’, ‘뒷골이 당기는구나’, ‘마음속으로 상대방에게 이러이러하게 말을 쏘아붙이는구나’ 등등 화를 내는 내 모습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내 마음과 감정을 잘 관찰하면 내가 만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아무리 찾아봐도 첫 번째 화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화살을 맞을 당시에 화살을 제거하고 약을 바르고 치료를 했어야 했는데 그대로 방치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오랜 시간이 지나 곪을 대로 곪아서 살짝만 건드려도
아프고 나중에는 가만히 있어도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화살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지금은 희미해져버린 첫 번째 화살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큰 착각 중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두 번째 상처 즉 기분이 나쁘다, 짜증이 난다, 화가 난다는 것이 나의 감정이 아니라, 타인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타인의 행동은 첫 번째 화살입니다. 화는 내가 만든 두 번째 화살에서 생긴 상처입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처럼, 단순하게 시간적인 인과 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자칫 착각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 ‘화가 난다’는 그림을 그려놓고 타인이 그렸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내 마음속 풍경을 살핀다는 것은 화를 내는 내 마음을 그냥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살들을 찾아내어 뽑아내고 치료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입니다.
내 마음은 화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려놓고 남이 그렸다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괴상한 화가입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잘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도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마음도 또한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__ <화엄경>의 ‘야마천궁게찬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