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2019년 10월 9일 수요야간법회

“불교는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가, 개인주의를 지향하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 등산 동호회의 산행에 동참하여 하루 동안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정상에 올라 전망대 한쪽에 자리를 펴고 점심 도시락을 나눠 먹는데 마치 학창시절 친구들과 반찬을 나눠 먹듯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로 간략하게 법문을 했습니다.

“요즘 사회가 힘든 것은 이전부터 이어져오던 공동체 정신이 훼손되고 모두 개인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을 같은 공동체 단위에서 할 수 있던 것들을 이제는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 법령, 혹은 민간서비스가 대체하고 있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듯 이제는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오늘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희미해져 있던 공동체 정신을 확인할 수 있어서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대충 이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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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참 좋은 미담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곰곰이 곱씹어보니 ‘공동체 정신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라고 눙칠 수 있는 자리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산우회에는 처음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존에 안면이 있고 계속 모임을 함께 해온 사람들끼리는 끈끈한 정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나누어 먹으려고 반찬도 신경 써서 준비해기도 했습니다. 반면, SNS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접수한 신규 회원들은 종종 혼자 겉도는 모습을 보이곤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게 된 모양입니다.

우리들이 지금의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공동체 중에서 개방되어 있는 공동체는 별로 없습니다. 사실
개방되어 있다면 공동체라고 하기 힘들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공동체는 지연, 혈연, 학연 등으로 이어진 맨투맨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정서적 동질감은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모임은 불특정 다수의 느슨한 모임이지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산행 같은 경우는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모집을 하였으니 일면식이 없는 개인들도 당연히 접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친분이 쌓인 회원들끼리는 서로 친밀감도 있고 모임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더라 이겁니다. 그럴 때 새로 온 사람들은 아무래도 주변에서 겉돌 수 밖에 없습니다. 겉돌다 보면 자연스레 따로따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누군가 의식적으로 새로운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챙기기 않는 이상 신규회원이 자연스럽게 기존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존의 공동체는 폐쇄적인 반면 그 안에 끈끈한 유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공동체는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를 느끼지 않아도 그 단체가 표방하는 목적에 동의하거나, 아니면 내가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하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설령 끈끈한 공동체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개인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면서 외연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그 안에서 기존 사람들끼리의 자연스러운 폐쇄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기존 멤버들 사이에서는 공동체주의가 자연스럽게 관철되지만 새로운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스스로 판단하여 들어온
것입니다. 어딘가 언발란스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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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공동체주의를 우선하는가 개인주의를 우선하는가.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숫타니파타의 게송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물에 젖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는 자기중심이 확고하고 사상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휘둘리지 않고 제 갈 길을 갑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은 사회적인 편견, 습관, 터부, 도덕, 윤리 등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내 할 바를 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식으로 부처님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의 갈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멋진 황금 팔찌를 팔에 하나만 끼우면 팔을 아무리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개를 끼웠을 때는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납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고 잡음이 생긴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불교는 개인주의를 우선시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집단, 공동체 혹은 전체보다 개인의 판단을 중시하고 개인을 주체로 삼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불교가 파급력을 가지는 데는 서구사회의 개인주의적인 전통과 잘 부합한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주의는 나쁜 것일까요? 우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기주의는 나 자신을 이롭게 하자는 주의입니다. 반면 개인주의는 집단, 전체, 조직 혹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을 우선시하는 겁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는 또 있습니다. 이기주의에는 없지만 개인주의에는 꼭 필요한 것이 배려입니다.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나’라는 개인이 중요한 만큼 타인 역시 한 사람의 주체적인 개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개인주의의 중요한 특성이자 덕목입니다.

실제로 불교 학자 중에는 자비심의 현대적 해석을 배려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비심은 마음 속에서 넘쳐 흐르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가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자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일 년 365일, 매 시간 쉬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숭고한 모성이라도 불가능합니다. 어느 순간 식어버리는 감정을 자비심이라 하기는 곤란합니다. 때문에 자비심은 뜨거운 사랑이라기 보다 차가운 배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개인주의다’라고 말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개인주의는 배려를 전제로 하고, 배려는 곧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이번 산행을 통해 저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집단주의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단주의가 개인의 자율성과 개인에 대한 배려, 개인의 주체성을 억누르는 것도 또한 보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양자택일입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더 이상의 생산적인 토론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예스(yes) 아니면 노(no)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집단주의의 폐해입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한 배려도 물론 필요하지만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 안에서도 생각과 견해, 주장이 완전히 똑같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는 이미 와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건만 갖추어지면 언제라도 폐쇄적인 집단으로 뭉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제가 본 것도 그 중 하나 일 것입니다. 공동체 정신은 좋지만 공동체를 중시하다보면 집단주의, 전체주의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는 좋지만 개인만 챙기다 보면 이기주의가 강해질 것입니다. 중도의 길을 찾아가는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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