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을 끊어서 편안히 잠자고
미움을 끊어서 슬프지 않네
참으로 바라문이여
뿌리에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이 미움을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며
그것을 죽이지 않으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
부처님께서 미움에 대해서 설하신 게송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주 명망 높은 바라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부처님을 너무나 따르고 신봉하여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쫓아와서 화를 냈습니다. 이 게송은 그에 대한 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상대방의 화를 그대로 화로 되돌려 주지 않았습니다.
화내는 이를 관찰하고 본인의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혔습니다. 그러면 화는 화를 낸 이에게로 다시 돌아갑니다. 자기계발이나 처세술 강의를 보면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랬구나!”라고 말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 충돌하는 일이 줄어들고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화를 내면 맞받아치는 대신에 화를 내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대응을 일상에 적용한 경우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감정적인 발언을 할 때 그 안에는 사실도 있고 나와는 다른 자기만의 주장, 견해, 입장 혹은 관점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과 사실을 정확하게 구별해낼 수 있어야 그나마 부처님처럼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송광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뭄이 심한 여름이었는데 송광사 해우소 앞 연못에서 나는 심한 악취 때문에 짜증이 났던 적이 있습니다. 이 짜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냄새 자체가 주는 불쾌함입니다. 이것은 팩트입니다. 본능적으로 악취를 맡으면 불쾌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연못에서 냄새가 나면 참배객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불쾌함입니다. ‘화장실이 항상 청결해야 관광객들이 와서 불편하지 않다’는 내 생각이 옳고 당연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짜증이 나는 겁니다.
사실과 견해는 분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견해에서 비롯되는 짜증은 내가 이미 특정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논쟁을 할 때 화가 나는 이유는 그 사람 자체가 불쾌해서가 아닙니다. 내 생각과 다른 말을 하고 내 생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견해와 견해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이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견해와 주장을 사실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내 견해고 내 주장인데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내 관점과 내 입장을 사실화 시킵니다.
관점은 내가 보는 시점이며, 입장은 내가 서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관점이나 입장은 같은 말입니다. 보는
위치에 따라 같은 물건이라도 다르게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관점이나 입장에 따라 프레임이 결정됩니다. 관점 혹은 입장이 다르면 프레임이 달라집니다. 프레임이 달라지면 사실도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프레임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병사 한 명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두 병사가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한 병사는 부상병에게 물을
먹여주고 한 병사는 여전히 부축을 하고 있는데 둘다 총을 메고 있습니다. 세 사람이 모두 나온 사진을 보면 두 병사가 한 부상병을 도와주는 전우애가 넘치는 모습입니다.
프레임을 옮겨서 두 사람만 나오게 바꾸어 봅시다. 오른쪽 병사와 부상당한 병사만 있는 프레임을 보면, 오른쪽 병사가 부상당한 병사에게 물을 주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왼쪽 병사와 부상당한 병사만 있는 프레임에서 왼쪽 병사는 마치 부상당한 병사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똑같은 사진인데 프레임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서로의 견해와 주장이 달라서 부딪치는 경우에 우리는 객관적인 근거를 들어서 상대방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근거’란 사실 나의 주장, 견해, 입장 혹은 관점들을 사실화 시킨 겁니다. 심지어 내가 어떤 관점에서 자료들을 모았는지에 따라서 같은 자료를 가지고도 다른 의미의 사실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어떤 관점과 입장에서 어떤 프레임을 만들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갈등과 관련한 또 하나의 일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강했던 나라인 코살라국은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국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벌였습니다. 코살라국의 왕은 군사를 일으켜 석가족을 정벌하는 원정길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코살라국의 군대가 가는 길목에 있는 고목나무 밑에서 부처님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 홀로 이곳이 앉아계십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였습니다.
“일가친척이 없는 세상은 마치 이 고목나무와 같구나”
불자였던 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군대를 철수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국을 정벌하러 나선 코살라국 군대를 홀홀단신으로 막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세 차례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이 네 번째 정복길에 올랐을 때에는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였습니다.
처음에 언급한 바라문의 일화처럼 될 수도 있지만, 현실은 부처님의 일화처럼 둘 중 하나가 굽힐 수밖에 없는 일이 태반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보기 싫은 뉴스를 보고 싶지 않으면 텔레비전을 꺼버리면 됩니다. 이것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단순히 회피하는 것과 열반 즉 번뇌의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중생이라면 번뇌를 일으키는 일에는 끼어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번뇌의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열반은 “여기 불이 났으니까 저기로 가야지!” 하며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문제를 직면하되 마음에 번뇌가 없는 것입니다. 한편 사회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에 직면하더라도 내 마음속의 번뇌를 스스로 잘 다스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마음공부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산속에서 아무 일 없이 유유자적하게 살면서도 항상 근심 걱정과 화가 머릿속에 가득 차있다면 그는 수행자인 것처럼 보여도 실은 중생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화를 관찰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주장을 관찰한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그 주장에 대한 내 안의 입장과 관점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랬구나’라고 수긍하는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수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의 내면을 관찰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미움과 증오를 극복하기 위한 선결조건은 내 마음을 또렷하게 관찰하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번뇌의 불꽃을
끄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입장과 관점에 휘둘리지 않고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궁극적으로 갈등의 원인을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게송의 나머지를 함께 읊어보면서 법문 마치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주의 깊게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