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사랑에 대한 올바른 생각 – 자비경 해설 ①

2019년 10월 1일 초사흘 법회

증심사 목요봉사팀은 매주 목요일마다 관내 어르신들에게 점심공양을 대접하는 봉사를 하고 있고 있습니다. 제가 증심사에 온지 만 1년이 다 되어 가는데(2019년 10월 기준) 증심사 목요봉사팀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건성으로 들어서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반성하면서 기왕에 하는 봉사 더 좋은 재료로 더 맛있는 공양을 대접할 수 있도록 사중에서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시는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참 고생이 많으시고,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증심사 목요봉사팀은 10년 넘게 꾸준히 활동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10년을 꾸준히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까요? 개중에는 봉사를 하다가 나이가 들어 쉬는 분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 사정으로 잠시 쉬었다 다시 하는 분, 또 쉬지 않고 계속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꾸준히 10년을 이어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자비심’을 흔히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증심사 목요봉사팀은 매주 봉사를 하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자비심이 철철 넘쳐흐르고, 마음속에서 감동이 뭉클하고,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서 안달하셨을까요? 매주 한결같이? 감히 생각건대 늘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비심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기 위해선 먼저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사랑. 러브(love)란 무엇인가.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내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제 개인적인 경험을 먼저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십 수 년 전에 강화도의 작은 절에서 기도하며 산 적이 있습니다. 그 때가 6월 중순쯤이었는데 어떤 신도분이 손바닥만 한 강아지를 데려와서는 그냥 놓고 가는 겁니다.

40대가 되도록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데 난생 처음 어미와 떨어져서 벌벌 떠는 강아지를 보자, ‘이것을 내가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이 제일 먼저 들이닥쳤습니다. 그 다음 드는 생각은 ‘철없는 젊은 아빠의 심정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앞에 닥친 상황이 너무 부담되니까 벗어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담감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정이 들어서 엄청 친해졌습니다.

개의 이름은 보리라고 지었는데, 보리는 태어난지 8개월 만에 다른 개와 눈이 맞아서 새끼를 뱄습니다. 첫 새끼는 나오자마자 죽고, 새벽 내내 다섯 마리를 낑낑거리면서 낳는 것을 밤새 지켜보았습니다. 아침쯤 되어서 출산을 끝낸 보리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축 쳐져있고 새끼들은 엄마 배에서 꼬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순간 보리와 그리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때 나는 순간적으로 사랑을 느꼈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순수한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짧은 몇 초 동안 느꼈습니다.

“보리야, 수고했다. 고생했다.” 이런 말을 보리에게 건네는데,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올라왔습니다. 이런 것이 조건 없는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출가 전에 연애 한 번 안 해 보았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식의 순수한 애정을 그 순간 처음으로 느낀 것입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이라고 느꼈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었구나!’

여기 계신 분들은 아이를 낳고 키운 경험이 있으니까 장가도 못간 저 중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만, 감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중생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소유욕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확신하건대 그것은 소유욕입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배하기를 원하는 소유의 욕망이 아닙니다. 오늘 저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내 배 아파서 자식을 낳았다고 하면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사랑이 왜곡될까요?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랑이 변질되고 내 자식이라는 생각에 눈이 멀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뭔지 몰라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잘 보고 이것이 사랑인지 혹은 집착과 소유욕으로 변질된 것인지를 잘 보라는 말입니다.

서양의 학자들은 사랑을 여섯 가지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에로스(Eros)적인 사랑입니다. 성적 욕망과 쾌락으로써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 필리아(Philia)적인 사랑입니다. 이는 가족 간의 친밀감, 조건 없는 믿음, 의리, 동지애와 같은 마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루두스(Ludus)라는 것입니다. 흔한 말로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썸’ 타는 것입니다. 연애하는 건 아닌데 둘이 마주보면 눈빛이 반짝반짝 통하고 괜히 장난치고 싶고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만 해도 재미있는 사이입니다.

네 번째는 프라그마(Pragma)입니다. 이것은 부부애입니다. 부부애가 연애감정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제가 간접 경험한 바로 부부애는 가족을 같이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상대방에게 가지는 의리, 전우애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험한 파도를 같이 헤쳐 나가는 동료로서 가지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입니다. 다섯 번째는 아가페(Agape)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라고 하면 흔히 성적 쾌락이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과 혼동하는데 둘은 같지 않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을, 말하자면 같은 민족이나 혹은 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나라 사람이나 노예나 귀족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똑같다는 마음에 입각한 인류애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사랑과 믿음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이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이라면, 자비는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가지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개미나 지렁이나 인간이나 바퀴벌레나 다 똑같은 중생이라고 감싸 안는 마음입니다. 이렇듯 앞서 말한 모든 것이 다 사랑이라는 말로 통용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살다보면 나타나는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고 ‘아 이게 사랑하는 마음이구나’, ‘사랑은 마음의 문제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당신 없이는 못살아. 그대 없이는 못살아. 떠나가면 못살아’ 하는 것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연애감정은 여러 가지 사랑 중 아주 일부분입니다. 그 이외에도 사랑의 감정은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사랑을 한 가지로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폭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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