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종교인가?
불교는 종교의 3대 요소를
갖추었으므로 종교이다.
우리는 흔히 불교를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묻겠습니다. 불교는 종교입니까? 종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왜 불교는 종교일까요? 불교는 교주, 교리, 교단이라는 종교의 3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교주입니다. 다음으로 어마어마하게 방대하고 복잡하고 체계적인 불교사상[교리]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아우르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부처님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단이 있습니다. 교단은 비구, 비구니, 우바니, 우바새 등 출가자와 재가자를 모두 포함하는 사부대중 즉 승가를 말합니다.
불교는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라는 옷을 입고 있다.
이처럼 불교는 서양의 종교학에서 이야기하는 종교의 3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기독교에 견주면 무언가 다릅니다. 바로 신(神)이라는 존재입니다. 부처님이 신입니까? 고타마 싯다르타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이고 수행자입니다. 반면 기독교의 신은 말 그대로 이 우주와 세계를 창조한 신입니다.
전지전능하여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모든 걸 다 알고, 인간들의 생사여탈권을 다 가지고 있죠. 그래서 사람들이 말을 안 들으면 물과 불로써 벌을 내립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신은 인간이 아닌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서구의 종교관으로 비춰 봤을 때 불교는 종교라고 볼 수가 없어요.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 불교에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했으니까 신이 아닌 게 맞는데, 그렇다면 미륵불이나 연등불이나 노사나불과 같은 부처님들은 무엇입니까? 이 부처님들도 사람입니까?
불교라는 것이 처음 시작할 때는 수행자들의 집단으로 시작하여 그들을 따르는 재가자 무리들이 생기면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재가자들이 불교를 공부하려고 보니까 부처님 말씀이 쉬운 것도 아니고 또 먹고살아야 하니 배우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인도의 대표적인 종교인 힌두교는 이미 그때부터 지금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신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인도인에게 힌두교는 서구적 관점의 종교라기보다 문화, 나아가 삶 그 자체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평소 하던 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종교라는 외피를 씌운 겁니다. 다시말해 미륵불,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같은 분들은 이미 인도인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신’ 중심의 세계관이 불교로 스며들어온 결과입니다.
불교는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는
수행시스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의 옷을 입은 것, 그것이 불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면 종교인데 안을 들여다보면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불교는 수행체계입니다. 수행 시스템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바를 나도 깨달을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겁니다. “부처님이 한 그대로 하면 너도 깨달아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내가 스스로 깨닫고 느끼고 체험해야 그것이 불교입니다.
수행이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행을 닦아 마음을 바꾸는 것
그러면 수행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닦을 수(修) 행동 행(行), 행동을 닦는 것이 수행입니다. 행동을 닦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입각해 수행의 정의를 다시 내려보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행을 닦아서 마음을 바꾸는 것’ 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은 몸으로 하는 행동만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행을 업(業)이라고 합니다.
신(身)・구(口)・의(意) 3업이 있습니다.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행동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다 불교에서는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음만 바꾼다고 해서 내 자신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을 바꾸고 생각을 완전히 바꾸려면 행을 닦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부터 화를 내지 말아야지’, ‘오늘부터 부드럽게 말해야지’ 라고 생각을 바꿨다고 합시다. 그런데 버럭 화내는 습관은 안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은 생각이 바뀐겁니까? 안 바뀐 겁니까? 안 바뀐 겁니다. 꿈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술에 엄청 취해서 필름이 끊어져도 화를 안 내야 생각이 바뀐 겁니다. 수행을 더 알기 쉽게 금연에 비교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담배를 피우다 보니까 목도 아프고 몸도 무거운 부작용이 생기는 것을 알고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생각의 전환이 일어난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런데 몸 안에는 이미 엄청난 양의 니코틴이 들어가 있으니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행동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노력을 하다보니 몸이 좋아지는 게 느껴지고, 담배는 몸에 안 좋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렇게 담배의 유혹을 뿌리치고 금연하기 위해 꾸준히 실천하다보면 언젠가 내 몸속에서 니코틴이 완전히 다 사라지는 날이 오게 될 겁니다.
니코틴이 완전히 사라져야 그때 진짜로 금연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첫 번째, 일체개고,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여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 무명의 뿌리를뽑기 위해 의도적으로 열심히 노력합니다. 즉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수행을 하다 보니까 나의 깨달음이 더 깊어지고 확고해집니다. 깨달음의 내용이 깊어질수록 수행도 더 정밀하고 더 철저해집니다. 이렇게 깨달음과 수행이 반복되다보면 어느 시점에는 완전한 깨침을 얻는 겁니다.
불교는
수행이다
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절은 수행 공동체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도 부처가 되겠다 라고 생각하고 같이 수행하는 곳이 절입니다. 그렇다면 절의 주인은 누굽니까?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머리 깎은 사람도 있고 머리 긴 사람도 있습니다. 머리는 깎고 있는데 수행을 안 하면 그 사람은 수행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머리는 기르고 있지만 열심히 수행하면 그 사람은 수행 공동체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자는 누구입니까? 나도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불자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즉 불제자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막연하니까 구체적으로 부처님이 제시한 것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여기에 맞춰서 생각하라는 것, 바로 오계입니다. 오계에
맞춰서 일상생활을 하면 그 사람은 불자입니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모든 이야기가 수행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됩니다. 그만큼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수행입니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생각하는 것도, 길을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다 수행입니다. 좁은 의미의 수행은 참선, 기도, 독경처럼 집중적으로 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좁은 의미의 수행을 하고, 그 힘으로 평상시 일상생활에서 넓은 의미의 수행을 꾸준히 해야 진정한 불자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이라 함은 이 두 가지가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불교는 수행입니다. 이것 하나만 머릿 속에 입력하고 있으면 나머지는 거기에 살을 붙이는 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