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비유로 풀어 본 삶의 의미

지수화풍이 모인 육신은 언젠가 흩어진다

네 마리의 독사는 지수화풍의 사대(四大)입니다. 사대는 나의 육신을 말합니다. 내 몸뚱이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성질이 일시적으로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대를 독사에 비유했을까요?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 보고 싶은데 눈이 뿌예서 잘 안 보이고, 계단을 뛰어올라가고 싶은데 무릎이 시원찮고, 잠을 잘 자고 싶은데 한 시간마다 소변이 마려워서 깹니다.

네 마리 독사 중 한 마리만이라도 성질을 부리면 내가 고통을 받고 심하면 죽음에 이릅니다. 결국 “사대는 언젠가는 흩어진다, 몸뚱이는 잠시 모여 있는 것이고 언젠가는 흩어진다.”는 진리를 비유로 든 겁니다.

‘나’는 오온의 총체

다섯 명의 살인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온입니다. 오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다섯 가지로 이뤄졌습니다. 여기에서 온(蘊)이라는 것은 쌓여있다, 모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미가 내 앞에 있다고 합시다. 색온은 내 앞에 있는 뭔가를 보는 감각기관, 즉 눈의 망막입니다. 수온은 장미에 대한 즉각적인 느낌이고, 상온은 장미라는 이름입니다. 행온은 아름다운 장미를 꺾고자 하는 의도이며, 식온은 ‘저기에 아름다운 장미가 있구나. 꺾어서 집에 가져가고 싶어.’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오온은 세상을 대하는 나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오온이 모여 있는 것, 오온의 총체는 곧 우리가 생각하는 ‘나’입니다. 오온을 살인자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모든 번뇌의 원인이며,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살인자로 비유한 것입니다.

욕망과 쾌락 사이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무엇일까요? 쾌락입니다. 욕망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에너지입니다. 먹고 싶은 욕망, 자고 싶은 욕망이 없다면 죽습니다.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욕이 없다면 인간은 멸종합니다. 반면 쾌락은 욕망한 것이 채워졌을 때 따라오는 일종의 보상입니다. 그런데 보상이 매우 짜릿하고 기분 좋기에 자꾸만 쾌락을 맛보고 싶어합니다. 쾌락을 다스리지 못하면 욕망은 곧장 탐욕과 집착으로 변질됩니다.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나를 유혹하고 괴롭히는 것이 바로 쾌락입니다. 그래서 쾌락을 가장 가까운 친구로 비유했습니다.

내 안과 밖의 도적, 12처

텅 빈 마을과 그곳에 만난 여섯 명의 도적은 6내입처와 6외입처 즉 ‘12처’를 말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6내입처는 인식하는 주체, 6외입처는 인식되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봅시다. 보니까 눈이라고 말하면 맞는 말이지만 눈이니까 본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시체도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합니다. 무엇인가가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보는 놈도 보이는 대상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보는 행위가 주로 눈에서 이뤄지니까 우리는 착각하고는 합니다. 눈이 보는 것이라고요.

텅 빈 마을은 6내입처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6외입처는 밖에서 쳐들어오는 도적입니다. 내 안에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6내입처와 밖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되는 6외입처가 합쳐져서 텅 빈 마을의 도적 떼가 되고 그것이 나를 피폐하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을 계속하고 싶고, 아름다운 이성과 계속 함께 하고 싶고, 도박의 스릴을 계속 느끼고 싶습니다. 그 결과 자기 욕망과 집착을 다스리지 못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를 텅 빈 마을과 마을을 약탈하는 도적으로 비유했습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뗏목, 팔정도

내가 도망쳐온 세계는 오온이 ‘나’라고 생각하는 세계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가 바로 이 언덕이고, 물 건너의 저 언덕은 무아의 도리를 깨달은 세계입니다.

그 사이에 큰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건너가려면 뗏목을 만들어서 노를 저어 가야 합니다. 뗏목은 바로 팔정도입니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정견은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은 생각을 올바르게 하고, 말을 올바르게 하고, 행동을 올바로 하고, 올바른 생계 활동을 하는 것으로 계율을 지키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정정진, 정념, 정정은 물러섬이 없는 노력으로,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견해를 세우고, 계율을 지켜야 비로소 위빠사나와 사마타 수행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집니다.

수행 없이는 깨달음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는 관(觀), 사마타는 지(知)라고 합니다. 염불을 열심히 하고 절을 열심히 하는 것도 지관수행입니다. 이런 수행을 통해서 삼매에 들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뗏목을 만들었다 해도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뗏목을 가만히 두면 흐르는 물에 쓸려 내려가 버립니다. 열심히 두 손 두 발로 노를 저어서 가야 합니다.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노력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갖춰져야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내가 만든 잘못된 생각에 내가 쫓기다가, 팔정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세계로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한 인생에 대한 올바른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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