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거울 속 자신에게 놀란 사람

2019년 12월 26일 초하루법회

가난한 사람은 전생에 지은 좋은 업이 많지 않아서 사는 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실재하는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여 금은보화를 팽개치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거울에 비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은 금은보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자세히 보면 두 명의 내가 나옵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내가 있고,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거울에 빛이 반사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내가 아니라 거울입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다만 거울에 반사된 나의 모습, 나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거울에 복사된 나의 모습입니다. ‘나’라는 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동물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거울 뒤를 확인하기도 하고, 거울 속 자신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실제로 존재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옷매무새를 고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우화 속의 가난한 사람은 거울에 복사된 자기 모습을 보고 자신과 다른 사람이 저 안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소스라치게 놀라 금은보화를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의 어리석음이 굴러들어 온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가난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비웃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전혀 하지 않을까요?

마음 역시, 마치 거울과도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마음거울이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마음이 하는 가장 큰 일 중의 하나는 세상을 아는 작용입니다. 현재까지 마음은 뇌의 활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뇌는 딱딱한 두개골에 둘러 쌓여서 외부와 완전하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뇌는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외부 세계와 접촉할 수 없습니다. 이런 뇌가 어떻게 세상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눈, 귀, 코, 혀, 피부의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뇌는 이들 감각기관으로부터 건네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바깥세상의 이미지를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거울에 맺힌 이미지인 것입니다. 거울이 내 모습을 복사하는 것처럼 마음 역시 바깥세상을 복사하여 마음 안에 이미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어떤 물체가 있습니다. 이 물체에 반사된 빛이 나의 망막에 와 부딪힙니다. 그러면 망막은 이 빛의 정보를 활성화된 일련의 전기 신호로 바꿉니다. 이 일련의 전기 신호는 뇌의 시각피질 영역으로 전달됩니다. 5차에 걸친 시각 피질 영역에서의 처리 과정을 거치면 마음이 바깥세상을 복사하는 작업이 끝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거울에 맺힌 어떤 물체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뇌의 전두엽 영역, 즉 나의 의식이 이 신호를 처리하면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것은 컵이야”라고 말입니다.

나의 의식은 어떻게 마음거울의 이미지를 ‘컵’이라고 알 수 있을까요? 의식은 마음거울의 이미지와 기억 속에 저장된 여러 단어들을 대조하여 가장 부합된 단어를 마음거울의 이미지와 연결시킵니다. 마음거울의 이미지와 ‘컵’이라는 특정한 단어가 연결되면 비로소 우리는 이것은 컵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본다는 행위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뇌의 전두엽 영역이 마음거울에 형성된 이미지와 접촉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보는 것은 내 마음거울에 맺힌 이미지이지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밖의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를 본다고 착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듯, 우리 역시 마음거울에 맺힌 이미지를 보고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거울 속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 역시 그 사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눈 앞에 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마음속에 맺힌 이미지입니다. 그것도 ‘책’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이미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나의 밖, 내 눈 앞에 ‘책이 있다’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면 ‘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도대체 ‘책’은 무엇일까요? 금강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은 책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책일 뿐이다.” 여기서 첫 번째 책은 ‘책’이라는 단어와 연결된 마음거울 속 이미지입니다. 두 번째 책은 나의 바깥에 있다고 상정된 어떤 물건입니다. 세 번째 책은 다만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 개념이라고 합니다. ‘책’이라는 ‘말’은, 그저 마음속에 존재하는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이 나와 분리된 현실에 실제로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뒤바뀐 헛된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컵’, ‘책’을 예시로 들었는데 만약 내 앞에 있는 것이 ‘돈’이라면 어떨까요? 당연히 우리는 그 돈을 가지고 싶어 할 것입니다. 만약 뻔히 보고 있는데도 가지지 못하면 괴로워할 것입니다. 사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돈’이라는 이름이 부여된 마음속 이미지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집착하게 하고, 거기에서 모든 고통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절에서 공부하는 부처님 말씀들은 어떻게 보면 재미없고 따분한 이야기들의 반복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을 내 인생에 비추어서 생각하는 마음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님 말씀이 여러분 인생의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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