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보왕삼매론 간단 해설(2)

중생, 욕심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 만약 중생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스스로의 욕망을 잘 다스리는 것이라면 사바세계는 이런 모양이 아닐 것입니다. 스스로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다스리지 못하니까 억지로라도 다스리라고 <보왕삼매론>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2번 항목인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하는 마음이 생겨 근심과 혼란으로써 세상을 살게 된다’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평소 일이 술술 잘 풀리면 ‘내가 잘나서 그런가 보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니까 당연히 잘 풀리나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업신여기는 생각입니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잘 되니까’라는 생각으로 사치를 하게 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잘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주변의 친구나 물건의 소중함을 모르게 됩니다. 반대로 남을 업신여기고 오랜 친구와 물건을 소중히 할 줄 모르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평탄할 수 없습니다. 잘난 체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과 누가 같이 일을 도모하려 하고 도와주려고 하겠습니까?

욕심이 과해지면 탐욕이 됩니다. 중생들은 욕심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탐욕에 빠집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면 장애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탐욕이지, 욕망이 아니다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장애라고 여기는 것들은 장애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몸에 생기는 병이나 세상살이 살아가는 데 생기는 곤란함 같은 것은 나를 가로막는 것, 즉 장애가 아니고 그냥 어쩌다가 발생한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문제는 바라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생은 짧으니까 최대한 즐기자’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내 욕망에 내 마음의 눈이 멀어서 생긴 것입니다. 욕망이라는 틀 속에 마음이 갇힌 것입니다. 흔히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욕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탐욕이자 쾌락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욕망은 삶의 원동력입니다. 밥을 안 먹으면 굶어 죽습니다. 그러나 밥 먹는 것을 너무 탐하면 식탐이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인연을 맺어서 자손을 만드는 것은 건강한 욕망이지만, 섹스 그 자체를 탐하면 쾌락이 됩니다. 욕망은 우리 생활의 원동력이지만 쾌락과 탐욕은 장애물입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중생은 욕망으로 살아가고 보살은 자비심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보살이 되면 나는 욕망이 아니라 자비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욕망을 자비심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이 안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13.

지붕을 엉성하게 이은 집에

비가 새는 것처럼

수행이 안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14.

촘촘하게 지붕을 잘 이은 집에

비가 새지 못하는 것처럼

수행이 잘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

-법구경

이 게송은 부처님의 이복동생인 난다 비구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어느 날, 카필라 성으로 탁발을 나간 부처님께서 난다에게서 당신의 발우를 돌려받지 않으시고 수행처까지 돌아오시는 바람에 난다는 엉겁결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연으로 수행자가 된 난다는 차마 돌아가겠다는 말을 부처님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공부는 안 되고, 매일 신부 생각만 했습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난다를 불러, 원숭이를 보여줬습니다.

“이 원숭이가 아름다운가, 네 신부가 아름다운가?”
“제 신부가 더 아름답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예쁜 천녀들이 있는 천상으로 난다를 데리고 갔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었습니다.

“이 천녀가 아름다운가, 네 신부가 아름다운가?”
“부처님, 제 신부는 이 천녀들에 비하면 아까 본 원숭이만도 못합니다.”
“네가 열심히 공부를 한다면 천녀들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그때부터 아난은 치열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자 “난다는 천녀를 얻으려고 수행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난다는 열심히 수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고 나니 이전에 본인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어, 부처님을 찾아가 부탁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깨달음을 얻었고 지난날의 과오를 알고 있습니다. 이전의 약속은 부디 철회해주십시오.”

부처님이 대답했습니다.

“네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 나는 이미 그것을 철회하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 난다 비구에게 이 게송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지붕을 엉성하게 이은 집에 비가 새는 것처럼 수행이 안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는 것은 곧 깨달음을 얻기 전 난다 비구처럼 그저 앉아만 있을 뿐 신부 생각만 하고 수행을 하지도 않고 공부도 안 되는 모습을 뜻합니다.

‘촘촘하게 지붕을 잘 이은 집에 비가 새지 못하는 것처럼 수행이 잘 된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는 것은, 수행을 열심히 하면 깨달음을 얻은 난다 비구처럼 더 이상 신부나 천녀를 탐하는 탐욕이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거나 게을리하면 마치 엉성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어들듯, 욕망은 탐욕이 되고 집착이 되고 애착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열심히 수행을 하면 그 욕망은 자비심이 됩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지붕을 촘촘하게 지은 지붕처럼 탐욕이나 분노나 회의나 나태와 같은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원동력이 자비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일상적인 수행, 봉사와 도덕적인 삶
오늘 이야기의 결론은 수행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왕삼매론> 3번 항목을 보면 ‘공부하는 데 마음의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공부라는 게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공무원시험과 같은 공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업(業)이라고 합니다. 선업을 짓는 것이 공부입니다. 인생이 곧 공부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넓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수행이며 좋은 업을 짓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이 수행이 되려면 두 가지를 항상 잊지 말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첫 번째,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봉사를 하는 것은 내 안의 자비심을 키우기 위해서 입니다. 공덕을 베풀 때 과보를 바라는 것은 중생의 마음입니다. 봉사하는 마음은 공덕을 베풀 때 내 안의 자비심을 기른다는 생각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자원봉사만 봉사가 아닙니다. 내 삶과 내 일상이 봉사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노력하는 것과 노력마저도 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도덕적인 삶은 다섯 가지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합니까?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서 입니다. 욕망이 탐욕으로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이 바로 우리 불자들의 삶이고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왕삼매론>을 매일매일 읽으라고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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