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선과 악 그리고 죄

- 기독교와 상식적인 선과 악에 대한 생각들

2019. 3. 9. 초하루법회

2019년 개봉된 영화 <사바하>는 <검은 사제들>을 만든 장재헌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신흥종교의 비리를 통해서 현대 종교의 문제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악이 도처에서 활개를 치고 있고 우리들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도대체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영화는 위의 독백으로 끝이 납니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 역시 이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선과 악, 불교에서 생각하는 선과 악, 그리고 보통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이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오늘은 이 물음을 바탕으로 선과 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기독교는 선과 악을 아주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이 있었는데, 거기엔 선악의 지식을 알려주는 선악과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이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에 열린 열매는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 때 뱀이 나타나서 선악과 열매를 먹으면 너의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현명해질 것이라고 이브를 유혹합니다. 이브는 열매를 따먹는 순간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의 나무 열매까지 따먹어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킵니다.

아담과 이브는 왜 쫓겨났습니까? 여호와의 첫 번째 계명인 ‘순종하라’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명을 어긴 죄로 남자인 아담에게는 평생 노동하는 수고를, 여자인 이브에게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이브를 유혹한 죄로 뱀은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원죄는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명을 어긴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음. 이것이 원죄입니다. 그 원죄가 후손들에게도 내려와 후손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여호와는 어떻게 그 죄를 사하여 줍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서 인간들의 모든 원죄를 대신 받아 그 죄를 사하여 줍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내가 지은 죄만 참회하면 됩니다. 순종하지 않은 죄를 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호와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따르면 됩니다. 즉 믿으면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믿으면 모든 죄가 다 사라집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기독교의 선악관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설화입니다.

기독교의 선악론에서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아담과 이브는 가만히 있다가 뱀이 유혹하니까 넘어가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인간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어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존재가 유혹하니까 수동적으로 끌려가서 죄를 짓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악한 존재인 뱀이 객관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악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독교의 선악론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선악관이라기보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가지는 선악에 대한 생각입니다. 악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주변 환경이 이러이러해서 나쁜 짓을 한 거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선악론 혹은 상식적인 선악론은 아주 쉽게 얘기하면 이런 겁니다. “우리 애는 정말 착한데 주변에 나쁜 아이들이 있어서 유혹하고 꼬드기니까 어쩔 수 없이 같이 한 겁니다. 우리 애는 착한 아이입니다. 선생님! 보세요. 우리 애는 절대 나쁜 애가 아닙니다. 친구들이 나쁜 애들이에요.” 일반적인 선악론과 위 예시는 기본적인 구조가 똑같습니다. ‘인간 자체는 악한 존재가 아닌데 악한 존재가 따로 어딘가에 있어서 우리를 유혹하니 내가 고통받고 나도 죄를 짓는다.’ 이것이 상식적인 선악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감독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악이 이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데 엄밀하게 말해 기독교적인 선악론에서는 ‘신은 뭐하고 있느냐?’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순종하지 못한 나의 원죄를 참회하고 신 앞에서 절대 복종하겠다. 오로지 여호와만 믿겠다고 내 스스로 다짐하고 다짐해야만 이 인간사의 고통이 없어지는 겁니다. 전지전능한 신의 권능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적인 선악론에 비추어 보면 이 감독은 믿음이 부족한 겁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선악론에 입각하면 모든 문제가 명료합니다. 신에 대한 순종, 복종, 절대적인 믿음만 있으면 세상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살인은 아주 큰 죄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이 전쟁 중이라면 많이 죽일수록 영웅이 됩니다. 살인은 지극히 나쁜 행동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살인을 권장합니다. 악을 악이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악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과연 악이 객관적으로 실제로 존재하는가?’ ‘마치 저기에 산이 있고 건물이 있고 집이 있듯이 악도 어딘가에 실재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예를 들어 불륜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우리나라에서 간통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죄가 아닙니다. 개인 대 개인 간의 문제, 양심의 문제라고 우리 사회는 규정했습니다. 반면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의 경우 기혼자가 바람을 피다가 들키면 유부남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여자는 돌팔매질을 해서 죽입니다. 똑같은 연애인데 어떤 경우에는 낭만적인 로맨스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야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회에서는 연애 한 번 잘못했다가는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사회에 따라서 악이라는 판단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속옷만 입고 시청 앞 한 가운데서 활개를 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거 미쳤구만’ 하고 당장 신고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경찰이 와서 잡아간 후에 미풍양속을 해친 죄로 벌금을 물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콘서트 공연장에서 속옷만 입고 미친 듯이 춤을 추면 어떻습니까? 주변 사람들 모두 시끄러운 음악, 요란한 조명 그리고 분위기에 취해 별로 신경 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행위를 하는데 콘서트 공연장에서 하면 아무렇지도 않고, 길거리에서 하면 감옥에 간다? 이것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자성이 없다’, 다시 말하면 ‘공하다’고 합니다. <천수경>에서는 이것을 일러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즉 “죄는 자성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난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실에서의 선과 악은 시대에 따라서, 사회에 따라서, 전후 사정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수시로 변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선악과 현실의 선악은 확실히 다릅니다. 기독교적인 선악관은 어떻게 보면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가지는 선악에 대한 생각을 아주 정교하게 체계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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