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술에 취해 사는 노인
부처님 당시에 매일 술에 취해서 사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노인은 가족들의 부축을 받아 부처님을 뵈러 길을 나섰습니다. 부처님이 먼저 물으셨습니다.
“500대의 수레에 가득 담긴 나무를 모두 불사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레에 불을 싣고 와야 하겠는가?”
“불씨 하나만 있으면 500대의 수레에 담긴 나무를 모두 태울 수 있습니다.”
“그대는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을 얼마나 오랫동안 빨지 않고 입었는가?”
“일 년 동안 빨지 않고 입고 있습니다.”
“일 년 동안 빨지 않은 그 옷을 깨끗하게 빨려면 얼마나 많은 잿물이 필요한가?”
“옷 한 벌 빠는 데에 무슨 잿물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조금만 있으면 됩니다.”
“지금 그대 안에는 코끼리 500마리만큼의 깊고 오래된 업장이 꽉 차 있느니라. 평생도록 매일 취하도록 술을 마셨으니 그 악업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큰 악업도 오늘 오계를 받고 그것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순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마치 하나의 불씨로 500대의 수레를 다 태울 수 있는 것처럼. 약간의 잿물로도 일 년 이상 빨지 않은 옷을 깨끗하게 빨 수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은 노인은 그 자리에서 오계를 받고 즉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
초기경전 속 깨달음, 성인으로부터 받는 감화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을 친견하고 바로 깨달았다는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첫 번째, 수행이 깊고 깨달음이 아주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친견하면 그 사람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자비심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있던 깊은 번뇌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실제 20세기 중반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는 인도 아루나찰나에 있던 현인을 친견하고 자기 안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 것을 느꼈습니다. 왜 그랬을까 분석을 해보니 그 수행자를 만나고 나서 무의식 깊은 곳에 있던 트라우마, 불교식으로 말하면 크나큰 번뇌가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님은 그야말로 몇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대단한 수행자이기 때문에 그저 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 속 깨달음, 깨달음의 ‘단박’ 속성
두 번째, 깨달음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이야기할 때 드는 비유 중에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는 비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백년 넘게 빛이 든 적 없는 아주 깜깜한 방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불을 켜는 순간 곧바로 백년을 이어온 어둠이 물러가고 환하게 밝아집니다. 나가세나 존자와 그리스의 왕 밀린다가 대화한 내용을 담은 <밀린다왕문경>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밀린다 왕이 묻기를,
“지혜가 생기면 어리석음은 어디로 사라집니까?”
나가세나 존자가 되묻기를,
“왕이시여,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면 그 어둠은 어디로 사라집니까?”
“존자이시여,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면 방 전체가 환해집니다. 어둠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시여, 그와 같이 지혜가 생기면 어리석음이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예전의 어리석음 그 자체가 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한 순간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가 술 취한 노인처럼 지금부터 오계를 지키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단박에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는 아무리 잘 타려고 해도 자기 뜻대로 안됩니다. 몇날 며칠을 고생하며 연습하고 자빠지고 무릎을 깨먹다 보면 어느 순간 그냥 되는 것이지요. 누군가 자전거를 어떻게 타냐고 물어보면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깨달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고통스러움의 연속입니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성과가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별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깨칩니다.
깨달음, 꺼진 불을 켜듯 한순간에 오는 것
<금강경> 제14분에도 이런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이 이 세상 존재하는 것들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마치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존재하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면
환하게 빛이 나는 곳에서 온갖 것들을 또렷하게 보는 것과 같다.
앞 구절과 뒤 구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어두운 방에서 불만 켜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한 순간에 불이 켜지니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처음 출가한 수행자가 반드시 봐야 하는 <자경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 일 동안 수행한 마음은 천개의 수레를 가득 채운 보물과 같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티끌과도 같다.
백 년 천 년 동안 중생심에 빠져서 희로애락에 휘둘려 살아도, 그런 것들은 하루아침의 티끌과도 같습니다.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모두 사라집니다.
깨달음,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바뀌는 것
막연하게 ‘오계를 지켜야 한다’, ‘나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냥 부처님 말씀을 연구해보니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고 잡념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조금 들어보니까 그럴 듯하고 공부해보니까 이해가 되는 것 같은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 깨달으면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빛’에 대해서 자기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초입니다. “올해는 부처님의 제자답게 잘 살아야지!”, “올해는 꼭 목표를 이루어야지” 생각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더라도 처음 먹은 마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느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황소가 뚜벅뚜벅 걸어가듯 뜻한 바 우직하게 밀고 나가기를 바랍니다.
증심사 주지 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