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2020. 10. 23. 칠성재일법회
가을 단상
법당 밖은 벌써 단풍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종무소 옆 은행나무 잎이 초록빛에서 노란빛으로 연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은 낙엽을 주제로 이야기 해봅시다. 흔히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과연 ‘있는 그대로’란 어떤 의미일까요?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을 바라보면 누구나 ‘참 아름답구나.’ ‘정말 멋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단풍은 잎이 늙어서 병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 들어서 피부가 쪼글쪼글해지고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뽀얗던 피부에 검버섯이 피는 것처럼 단풍잎도 늙어서 변한 겁니다. 또한 낙엽은 죽은 나뭇잎입니다. 늙고 병들어 더이상 나무에 매달려 있을 힘이 없으니까 떨어져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무의 생로병사를 아름답다고 극찬합니다.
왜 그런가? 이유는 단순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빨갛고 노랗고 멋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멋있게 보이니까 멋있게 생각합니다. 그 전에는 녹색밖에 없었는데 울긋불긋 온갖 색의 경연이 펼쳐집니다. 우리가 ‘본 그대로’ 느꼈을 뿐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원효대사 해골물과 일체유심조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원효스님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원효대사 해골물’ 일화를 잘 아실 겁니다.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 선진 불교를 배우기 위해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가는 도중 동굴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는데 한밤중 목이 말라 잠에서 깬 원효스님이 주위를 더듬거리다가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맛있게 마십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가지가 아니고 해골이었습니다. 어제는 감로수였던 물이 오늘은 해골물이라니. 여기에서 크게 깨달은 원효스님은 당나라에 가지 않기로 하고 의상스님만 유학길 여정을 계속 갑니다.
이때 교훈으로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일체는 유심조’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일체유심조의 참뜻일까요? 화엄경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이 있습니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세간의 모든 것을 그려낸다.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나니 일체가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화엄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그린다고요. 우리가 보는 세상은 마음이 보는 그림입니다. 마음이 보는 그림을 이 세상이라고 착각합니다. 세상을 마음이 볼 때 이미 세상에 대한 나의 감정, 느낌, 생각이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 일은 마음먹은 대로 된다?
원효스님이 한밤중에 물을 마실 때 ‘이 물은 해골에 담긴 물이지만 더럽거나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물을 마셔서 세상 모든 일이 마음 대로 된다는 말이 나왔을까요? 한밤중에 물을 마실 때는 그것이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침에 깨서야 그것이 해골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원효스님도 거기에서 깨달은 겁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내 마음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는 거였구나!’ 원효스님이 크게 깨친 계기가 된 것은 아침에 마주한 해골이었습니다. ‘어젯밤에는 달디 단 물이었는데 이것이 해골물이었다니. 이렇게 놀랄 일이 있나!’ 우리 같으면 한 번 놀라고 넘어갔겠지만 원효스님은 큰스님이라서 그 일을 곰곰이 되짚어 본 것입니다.
‘왜 내가 놀랐을까?’ ‘왜 내가 당황했을까?’ 그 이유가 내 마음이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한밤중에는 달콤한 물로 그렸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해골물로 그린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화가와 같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낙엽도 마찬가지입니다. 낙엽을 보면 ‘나뭇잎이 늙고 병들어서 변하는 노화작용일 뿐인데 나는 이렇게 아름답게 받아들이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보는 순간 ‘와, 색깔이 정말 예쁘고 낙엽 지는 모습이 멋있다.’라는 감정이 튀어나옵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마음이 화가와 같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연기실상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실 깨달아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깨치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한 강렬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고 그 실제 모습과 내가 보는 이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쳐서 삶이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마음이 그린 그림을 실제 세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