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0] 차꽃 피는 계절, 역사의 향기를 따라

하이얀 꽃잎 가운데 노오란 수술. 아담하면서도 소담스러운 차꽃이 피어나는 계절입니다. 무더운 열기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 찬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은 차 향을 따라 남도의 고찰을 답사하기 좋은 시기이기도 합니다. 9월 13일 불교문화답사 길따라절따라는 30명의 동참자와 함께 하동 쌍계사, 남해 용문사, 사천다솔사를 다녀왔습니다. (10월은 초하루법회, 11월은 증심사 추계 성지순례로 대체합니다.) 몇 번 나서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답사라니, 아쉬움을 달래는 답사 여정을 공유합니다.
미처 몰랐던 보물과 선풍… 하동 쌍계사
지리산 품에 안긴 쌍계사는 발길 닿는 곳마다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거대한 보물상자 같습니다. 대웅전도 보물, 대웅전 안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도 보물, 부처님 뒤의 삼세불탱도 보물, 현재 대웅전에 걸린 것은 모사본이기는 하나 감로왕도 역시 그 본체는 보물입니다. 국가지정 문화유산 보물들을 너무나 예사롭게 마주하는 상황에 답사단이 당황(?)하자, 상주하는 쌍계사 포교사의 얼굴에 웃음이 걸립니다.
아쉽게도 신라 최고 문장가 최치원의 글씨로 유명한 국보 진감선사탑비는 보수 공사 중이라 전체를 관람할 수 없었습니다. 안전 펜스 아래, 비석을 받치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인 귀부를 보는 것으로 그쳤지요.
국보 ‘대신’이라 하기엔 그 감동이 몹시 큽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산철 해제 기간에만 일반에 공개하는 금당을 참배하는 뜻밖의 행운을 누렸습니다. 쌍계사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금당은 육조 혜능스님의 두상을 모셨다는 곳으로, 평소에는 수좌 스님들의 정진 공간이라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영역입니다. 육조정상탑 앞에 이르자 그 고요함에 압도됩니다. 마음을 모아 인사를 올리고 내려가는 길에는 팔상전에도 들러 부처님 일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남해 호구산 자락에 자리한 용문사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자연 속에 살포시 들어앉은 절집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호국사찰이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국사’으로 지정되었던 남해의 대표적인 사찰이기도 합니다. 용문사에 도착하자마자 점심공양을 하고, 봉서루를 지나쳐 대웅전으로 향합니다.
이 절 답사의 중심은 단연 건축적 완숙미를 자랑하는 용문사 대웅전(보물)입니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용문사대웅전은 화려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다포계 양식의 정수입니다. 촘촘히 배치된 공포와 겹처마, 그리고 길게 뻗어나온 추녀를 받쳐주는 활주가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짐작하게 합니다.
대웅전 내부로 들어가면 천장을 장식한 용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부처님 앉아계신 닫집 위와, 대들보와 서까래가 만나는 공간에도 커다란 용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남해라는 지리적 특성과 용궁 설화가 어우러진 특색이라 할 것입니다.
고려초기의 석조 미륵보살상을 모신 용화전을 시작으로 명부전과 영산전, 칠성각을 차례로 참배했습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는 배치이지만 ‘작은 절’이라 생각되지 않는 것은 전각들을 넉넉한 품으로 둘러싸고 있는 차밭 때문입니다. 차밭을 오르면 멀리 남해 푸른 바다가 보입니다. 차나무가 된 양,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한동안 긴 들숨으로 담아봅니다.

효당, 만해스님의 흔적 따라… 사천 다솔사
마지막 여정인 봉명산 다솔사는 주소지인 사천보다는 하동 방향 진교 인근이라 함이 더욱 정확합니다. 입구부터 소나무, 삼나무, 편백나무가 어우러진 근사한 산책길이 펼쳐집니다. 산림청 지정 ‘대한민국 100대 명품숲’ 중 하나인 다솔사 명상숲(솔밭길)입니다. 천천히 나아가는 버스에서 명상숲을 눈으로 담아보았습니다.
다솔사의 대웅전 격인 중심 건물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입니다. 적멸보궁에 들어서면 대웅전뒤편의 사리탑을 바라볼 수 있도록 유리창이 나있고, 그 앞으로는 옆으로 길게 누운 와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적멸보궁을 돌아 나가 진신사리탑을 중앙에 두고 우요삼잡 합니다. 탑을 오른쪽에 두고 세 번 돈다는 뜻이지요.

응진전과 극락전 뒤편으로는 자생 야생차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차를 가꿨다고 전하며,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현대 다도의 선구자로 꼽히는 효당 최범술 스님이 차를 만들었다 합니다. 또한 이 시기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을 중심으로 한 항일 비밀결사체 ‘만당(卍黨)’의 근거지가 됐습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 소설가 김동리, 이광수 등 많은 문인과 독립운동가들이 다솔사 안심료에 머물며 이 차밭의 반야차를 마시고 학문과 예술, 독립운동을 논했다 합니다. 그들이 앉았을 안심료 마루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