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서구 백석산 아래 운천저수지는 도심 속 호수공원이다. 광주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호(西湖)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인근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었고, 1951년 제방을 쌓아 농업용수뿐 아니라 시민들의 물놀이 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1995년에는 자연생태공원으로 조성해 여름에는 붉은색 연꽃이 저수지를 덮어 경관이 일품이다. 현재는 지하철 2호선 공사로 9월경에나 제 모습을 찾을 듯 하다. 사람들이 몰리는 유흥지에는 먹거리도 발전하기 마련이다. 당시 운천저수지에서 잡은 물고기로 요리하는 음식점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지금도 운천저수지 건너편 골목은 먹자거리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금호·상무지구가 개발되면서 악취와 해충 문제로 저수지가 매립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1995년부터 오·폐수를 차단하고 맑은 물을 공급해 호수 주변 7만 4,020㎡의 공간을 자연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잘 정비된 산책로와 음악분수, 정자를 갖추고 있으며, 특히 여름이면 붉은색 연꽃이 저수지를 덮어 경관이 일품이다. 아쉽게도 올해는 저수지를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 건설공사로 9월경이나 제 모습을 찾게 됐다.
그런데 몇 해 전, 운천저수지 산책로 가까이에 핀 연꽃송이들이 베어지는 일이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연꽃을 훼손한 것이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어느 종교인이 일부러 꽃송이를 꺾었다는 것이다.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에서 불교의 꽃이라며 연꽃이 뽑혔다는 소식을 접한 법정스님이 어느 일간지 칼럼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꽃에게 물어보라. 꽃이 무슨 종교에 소속된 예속물인가. 불교경전에서 연꽃을 비유로 드는 것은 어지럽고 흐린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다. 불교신자들은 연꽃보다 오히려 백합이나 장미꽃을 더 많이 불전에 공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 연못에서 연꽃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예전에는 운천저수지 일대가 울창한 숲이었다. 저수지에서 운천사 까지를 백석골이라 부른다. 광주의 전설에 백석골 유래가 담긴 이야기가 전한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얼마 전인 1940년대였다. 광주 중심지에서 10여리 떨어진 뽕나무 밭 인근에 용수라는 아이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뽕나무밭에는 오래된 석불이 하나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석불을 대비보살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어려서 죽은 아이가 저승에서 극락에 가도록 대비보살이 도와준다고 여겼다. 저승에서 극락으로 가기위해서는 강을 건너야하는데 악귀가 아이들을 붙잡아놓고 괴롭히는 것이었다. 저승길의 아이가 강에 이르면 악귀가 강가의 자갈돌로 탑을 쌓게 했다. 아무리 조심히 돌탑을 쌓아도 쉽게 무너져 극락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대비보살이 나타나 아이들을 대신해 돌탑을 쌓고, 아이를 업어 강을 건너 극락으로 데려다준다. 이런 연유로 대비보살인 석불에 돌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용수는 어머니를 잃고 4년 전에는 동생마저 잃었다. 날마다 새벽이면 뽕나무밭 석불 앞에 가서 깨끗한 작은 돌을 올려놓고 동생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그렇게 삼년이 지나자 용수가 쌓은 자갈은 석불의 무릎을 덮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용수가 기도를 하기위해 뽕나무밭으로 갔으나 석불이 사라지고 없었다. 석불을 찾기 위해 몇 날을 헤메이다 시내에 사는 일본인 부자가 정원을 꾸미기 위해 가져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달가량 광주시내를 뒤져 석불을 가져간 일본인을 찾아냈다. 하지만 정원에 석불을 갖다 놓은 뒤부터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운천저수지 옆 절에 갖다놓았다는 것이었다.
용수는 절을 찾았지만 절에서도 좋지 않은 일이 생겨 석불을 운천저수지에 버린 후였다. 용수는 저수지를 돌며 석불을 찾았다. 밤이 되어 달이 떠오르고 저수지 수면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덮였다. 한없이 저수지를 바라보던 용수의 눈에 갑자기 건너편에서 석불이 나타나더니 이내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로 변하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동생의 손목을 잡고 저수지를 건너오고 있었다. 용수는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와 동생을 향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언제부턴가 저수지 부근의 돌들이 용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하얗게 변했다. 그 후 마을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백석골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