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불교 지명이야기

서구 불암마을

부처님 닮은 바위에서 유래…의병장 김세근 장군 배출

지난달에 이어 또 하나의 광주정신을 생각해본다. 나라와 민중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의병이다. 서구 송학산이 눌재 박상을 배출했다면, 이웃해 있는 한생이산은 의병장 삽봉 김세근 장군(1550~1592)을 길렀다. 한생이산 초입에 자리한 학산사(鶴山祠)는 김세근 장군을 배향한 사당이다. 오늘의 불암마을이다.

불암마을에서는 한생이산을 ‘봉우리 여덟 개가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하여 팔학산(八鶴山)이라 부른다. 학은 고고한 선비를 상징하기에 언제부터인지 ‘가난한 선비’라는 뜻에서 ‘한생(寒生)이 산’으로 바뀐 듯하다.

한생이산에는 큼직한 바위가 있다고 한다. 바위의 형상이 부처님과 같아 불암(佛巖)이라 부른다.

불암마을은 이 바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흔히 ‘부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인다’고 했다. 한생이산 아래로 도도하게 흐르는 극락강과 넉넉한 서창들녘이 펼쳐있어 이곳에 사는 이들은 부처나 다름없다. 그리 높지 않지만 편안한 한생이산(164m)에 있는 바위는 신성하기가 부처님을 뵙는 듯 했나보다. 현재 불암마을에는 10여 가구가 자리해있다. 아쉽게도 부처바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가 없다. 한생이산 부처바위를 찾는 일은 숙제로 남겨둔다.

7월은 의병장 김세근 장군이 순국한 달이다. 불암마을과 김세근 장군의 인연은 1498년 연산군의 무오사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화 때 사관이었던 김일손의 후손이 직격탄을 맞아 끔직한 재앙을 당했다.

김세근 장군의 부친이 화를 피해 이곳 한생이산 아래로 세거지를 옮겼다. 세월이 흘러 김세근 장군은 1576년(27세) 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당시 율곡 이이와 함께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10만 양병론을 주장했다. 조정은 당파로 분열되어 양병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세근 장군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불암마을 앞 백마산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이 소문이 장성, 나주, 화순 일대에 퍼져 그 수가 수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이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김세근 장군은 광주 삼충신의 하나인 제봉 고경명 장군의 격문을 받고 의병 3백 명을 이끌고 싸움에 나섰다. ‘호남절의록’(1799)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그러나 전장에서 병을 얻어 귀향하여 요병 중에 스승인 호서의병장 조헌의 부름을 받고 병든 몸으로 다시 출정했다. 그는 전주에서 군영을 정돈하던 중 적군이 금산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으로 진군해 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으나 충북 충주 인근의 눈벌이라 부르는 와평(臥坪)전투에서 제봉 고경명과 같이 순절하였다.” 1592년 임진년에 왜군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7월 10일 42세 나이로 순절한 것이다. 불암마을 학산사에는 김세근 장군 부부 합장묘가 있다.

왜적과의 전투에서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한 씨가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기위해 싸움터로 갔지만 찾지 못했다. 한 씨 부인은 불암마을에 장군의 주검 없는 장사를 지낸 후 다음날 ‘남편은 죽어서 나라에 충성하고 부인은 죽어서 정조를 지키는 것이 사람의 도리(夫死忠婦死烈人之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지금도 불암마을 건너편 백마산에는 김세근 장군과 의병들이 훈련했던 수련골, 차일봉, 옥동샘, 장수굴
등이 남아 있다. 광주 서구 서창동 불암 마을에 있는 학산사는 서구 향토문화유산 제1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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