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은 왜 하는가?
신행(信行)이란 무엇인가?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편견과 아집이다. 모든 문제는 나로 인해서 비롯된다. 초기불교에서 팔정도를 기본으로 수행하는 것은 결국 나의 문제이며, 대승불교에서 육바라밀을 바탕으 로 닦는 것도 역시 나에 대한 집착, 나의 소유나 견해에 대한 집착을 어떻게 깨뜨리고 벗어날 것인가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나 대승권의 육바라밀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리심과 자비심이 근간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불교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괴로움의 발생 구조를 12연기에 의해서 보고, 소멸하는 방식 또한 연기의 이론으로 알기 위한 종교다. 이를 다 파악하고 나면 ‘어떻게 수행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고집멸도라는 사성제에 의해서 수행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사성제에 대한 신뢰를 가진 후에 그 내용을 이해하고 몸소 실천하는 것, 그것을 바로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 말한다. 신해행증의 과정이 곧 신행(信行)이며, 불교라는 종교생활의 근간이다.
절은 왜 하는가?
절을 하는 것은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는 행위이다. 나를 벗어나서 보살의 길을 가겠다는 약속이다. 진정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다시 보살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 아상을 버리는 공부가 절 수행이다. 자신의 가장 높은 머리를 불보살님의 가장 낮은 발아래에 두고 절한다. 나의 가장 귀중한 목숨을 바쳐서 절하는 것이다.
절의 기본은 3배이다. 3배는 삼보에 귀의하면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배우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성취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삼학을 배우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번뇌를 내려놓고 벗어나기 위해서다. 나라는 것은 결국 탐진치로 이루어진 개념이자 관념이다. 중생들은 흔히 이것 저것, 길고 짧은 것, 멀고 가까운 것으로 항상 분별하지만, 진리의 세계에서는 그것들은 관념일 뿐 진리가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사찰예절
불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흔히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닦는다는 말을 한다. 몸으로는 남을 살리고 남을 베풀고 신뢰를 베푸는 것이 업을 바르게 닦는 방법이다. 입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바른 말을 하고 진실된 말, 부드러운 말, 화합되는 말을 하며 쓸데없이 말을 퍼트리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을 해야 한다. 마음에 대해서는 불탐·부진·불치라 했다. 욕심을 부리고자 하는 생각, 화를 내려놓고자 하는 생각, 어리석음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자기를 다스리는 수행이자 신구의 삼업을 닦는다는 의미다.
사찰 역시 결국은 사람 사는 곳이다.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수행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있다면 곧 사찰예절로 드러난다. 이러이러하게 실천하라 하는 사찰예절의 조목을 모르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조심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갖춘다면 그것이 바로 사찰예절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불문
예불문은 오분향례(五分香禮)라 하여 예불을 드리기 전에 향을 올리는 게송으로 시작한다. 예불을 올리면서 자기 소원만 빌고 말 것인가, 혹은 어떤 스스로의 다짐이나 부처님과의 약속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으로 삼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돈을 가져오라 쌀을 가져오라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삶을 살고 지혜를 익혀 자유와 해탈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이에 다섯 가지 약속을 하며 예불을 시작하고 삼보에 대한 일곱 가지 예배를 칠정례(七頂禮)로 정리했다. 온 시방세계에 두루하신 부처님과 거룩한 달마, 여러 보살님들, 부처님 당시에 부촉을 받은 십대제자와 아라한들, 인도에서 중국으로 법의 등불을 밝힌 선지식과 부처님 법을 따르는 승가의 스승들께 예를 올리며 법계 중생 모두가 함께 성불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청한다. 비로전 부처님과 탱화를 보면 부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재가자들, 사천왕이 둘러싸고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에게 삼배를 올리는 것은 나 자신 또한 이런 분들의 경지에 오르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재가자라고 못할 것이 없다.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불교에서는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