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신행생활특집

무등산과 산신재

조선시대에는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묘향산, 북쪽의 백두산, 중심의 삼각산을 오악이라고 하여 주산으로 삼았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는 특정 산을 지역을 진호하는 주산으로 삼는데, 전남지역에서는 무등산과 금성산이 대표적인 진산이었다.

역사의 단편적인 기록을 보면 무등산 역시 하늘을 경배하는 다양한 의례가 거행되었고, 이외에 무속, 불교 등 신앙과 종교의 거점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부터 무등산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였을 것이지만 역사의 기록은 신라 때에 비로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제사편의 소사에 무등산이 언급된 것은 점차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제도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제를 모셨을 것임을 의미한다. 실제 무등산이란 산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고려사>악지의 삼국 속악 백제조에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이다.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 큰 고을이다. 이 산에 성을 쌓았더니 백성들은 그 덕으로 편안하게 살며 즐거이 노래를 불렀다’라는 기록이 있어 무등산곡(無等山曲)이란 노래가 있었다는 것을 전했다.

이 기록에서 무등산을 광주의 진산이라 함은 산신으로서의 자격을 얻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풍수지리적 배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오악, 삼산을 비롯해서 사진, 사해, 사독, 사성문, 사천, 사대도 등에 대해서 제사를 모셨던 것은 모두 그들을 신격화했다는 뜻이다. 진산 역시 신격화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산신에 대한 믿음은 철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광주 무등산신에 작호를 내리고 봄과 가을에 치제를 하도록 하는 점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제의를 지속적으로 모셔왔음을 알 수 있다. 원종 14년인(1273)에 삼별초를 진압할 때 은밀한 가호를 베푼데 대한 보답으로 무등산신에게 작호를 더해주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조선 태조 2년에 전국의 명산, 대천, 성황, 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는데, 전남지역에서는 지리산, 금성산과 함께 무등산이 ‘호국백’이라는 작호를 얻는다. 앞서 고려시대에 비하여 나라를 지키는 목적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봉작이라 할 수 있다.

이어 세종 때에는 예조에서 전국의 영험한 곳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국가에서 행하는 치제의 예에 따를 것을 건의하였다. 악. 독. 산. 천의 제품의례에 따라 정하였는데, 무등산도 이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세종 19년에는 예조에서 여러 도의 순심별감의 계본에 의거하여,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하였는데, 무등산의 위판에 적힌 ‘호국백위’를 삭제하도록 했다. 당시 ‘호국백위’를 삭제한 이유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 위상이 예전만 같이 못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무등산은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차 개려고 할 때에는 우레와 같이 우는 소리가 자주 나는데, 수십리에까지 들린다’는 기록을 보면, 무등산의 영험성과 신이성이 부각된다. 정약용은 ‘산 위에 사당이 있고 무당이 이를 지키고 있다’고 했고, 최남선은 무등산을 ‘천연의 신전으로 전라도 지방의 종교 중심지가 되고 산 전체가 하나의 당산터’라 했던 것처럼 무등산은 오래 전부터 신앙의 중요한 터전이었고 거점이었을
것이다.


<글 출처>
강심흔 – 한국불교의 산신신앙과 지장신앙 연구 –시대적 전개와 변용을 중심으로 –
김현진 – 한국 불교의 산신 수용 양상 – 영남지역 산신각 현장조사를 중심으로 –
서해숙 – 무등산 숭사(崇祀)의 전통과 현대적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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