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는 불교전래 이전부터 천신신앙, 산신신앙 등 고유의 토착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토착신앙 또는 민간신앙은 한반도 고대인들의 대표적 신앙이었으며 천신신앙은 고대국가의 지배이념이기도 하였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인 특성상 고대인들의 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며 자연히 그들은 산을 숭배 대상으로 삼아 산을 인격화하면서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이것은 산 자체를 신격화하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민족의 산신신앙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한민족의 탄생에 산신신앙을 결부시키고 있다. 산신신앙은 단군설화 이후 고대 이래로 한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채 수 천 년을 함께해 온 토착신앙이며, 자연신령 가운데 가장 일반화된 오랜 전통신화라고 할 수 있다.
환웅과 인간이 된 곰의 결합으로 단군 왕검이 탄생하는 단군의 탄생설화를 보면 사람이 되고자한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여 토테미즘(Totemism)적인 신앙형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단군설화에 나타난 산신신앙은 토테미즘과 원시적인 애니미즘 (Animism)의 성격을 띈 산신신앙이 결합한 것으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산신은 인격화되었다. 그래서 산신도의 산신 옆에는 호랑이가 자리하게 되었다. 여기서 곰이 배제되고 호랑이가 숭배동물이 된 것은 한반도의 사회적 환경변화에서 기인한다.
수렵사회였던 고대사회가 농경사회로 발전하면서 곰은 태양신의 아들인 환웅과 결합하여 땅을 관장하는 지모신(地母神)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농경사회에서 노동은 농작물의 재배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땅으로부터의 풍요를 기원하는 염원은 용맹하고 날렵한 호랑이보다는 곰의 둔중함과 끈기가 합당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결국 단군은 천지(天地)의 조화를 의미하고, 곰은 지모신으로서 천신(天神)과의 일치로 호랑이는 산신신앙으로 융화되어 산신을 호위하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 고대의 산신들은 옛 산 이름이나 전설을 통해볼 때 초기에는 대부분 여성 산신의 모습이었다. 유교가 들어오고 가부장적 사회 구조로 바뀌어 가면서 남성 산신으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여성 산신은 여성 존중의 모권사회의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여성 산신은 죽은 후에 산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산신이었고, 남성 산신은 죽은 후에 신격(神格)을 얻어 산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박혁거세의 모후를 선도산 신모로 여기고, 고구려 주몽왕의 모후 유화를 곡물신(穀物神)으로 숭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산신을 생산신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에는 왕경 부근의 산악에 산신제를 지냈다. 산천에 대한 제사는 고구려, 신라, 백제, 부여 등 고대 국가에서 이루어진 국가적인 규모의 종교행사로, 국가 수호와 재해방지를 위한 것으로 산악숭배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산악의 큰 동굴은 동굴신의 거처로 신성시되었고, 스님들은 이곳에서 거처하며 수행하였다. 또한, 큰 바위에 불상을 새긴 후 이를 보호하기 위해 목조가구를 설치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산악은 불교신앙처로 탈바꿈했다.
9세기 이후에 전국의 명산을 중심으로 사찰이 많이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며, 이곳은 대부분 고대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이기도 했다. 이는 기존의 산신신앙과 불교의 융화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산신이 불교 내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와 민중의 중요한 토착신앙이었던 산신의 불교 수용은 불교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당연한 문제였다.
고려시대에도 산악은 여전히 중시되었고 불교와의 결합 양상은 더욱 현저해졌다. 태조가 남긴 「훈요(訓要)10조」 중에서 제6조에는 부처를 섬기는 연등회(燃燈會)와 함께 하늘의 신령・산신・용신 등 하늘・
땅・바다 의 신을 받드는 팔관회(八關會)에 대한 규정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여섯째로 나의 지극한 관심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오악, 명산, 대천, 용신을 섬기는 것이다.
함부로 증감하려는 후세 간신들의 건의를 절대로 금지할 것이다.
나도 당초에 이 모임을 국가 기일과 상치되지 않게 하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이대로 시행해야할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산악숭배의 고유한 토착신앙이 고려시대에 오면 불교의 팔관회를 매개로 사회적 수용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의 토착신앙이 불교를 통해 재현・전승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고려는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에 불교와 오악명산에 기원하여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또한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산에 대한 가호(加號)가 시행되었다. 덕적산, 백악, 송악, 목멱산 등 사악에 대해 무당에게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산신신앙이 고려 왕실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정착하기 위해 산신신앙을 포용하였다면,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산신신앙은 불교를 발판으로 전승·발전되었다. 조선시대도 고려의 산악숭배가 계승되었고, 왕조의 산악숭배는 국가수호, 천재지변의 극복 등과 관련되어 그 중요성이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미 태조
때에 금강산, 지리산, 삼각산, 묘향산, 오대산 등의 오악이 제사를 지내는 산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한편, 응운공여(應雲空如, 1794-?)의 유망록에 수록된 「산신각 권선문(山神閣 勸善文)」의 내용에서는 산신의 영험함을 나타내고 있다.
산신은 보살이 큰 권한으로 불사를 도와 교화하다가
중생을 위해 자비를 일으켜 자취가 신위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들이 복을 구하면 주고,
재물을 구하면 주고, 자식을 구하면 주고,
빈곤을 구제하고, 부유함으로 구제합니다.
그러니 누각을 세워 봉안하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산신각을 새로 건립하는 일로 단께 두루고하노니,
선한 인연을 같이 맺기를 천만 축수하옵니다.
그리고 이에 봉축하노니, 사대문이 진실로 화목하고
온갖 법도가 시절에 맞아 위에서 아름다운 보물이 내리고,
아래에서 상서로움에 화합할 것입니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산신은 사람들이 바라는 부와 자신을 얻게 해주는 신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산신이 불교의 호법신중이면서 동시에 기복신앙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산신은 불교를 보호하고 돕는 역할을 하며 산신설화를 통해 불교 내에서 신앙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민간에서도 마을신으로서 동신에게 제를 지내는 동신제, 서낭굿, 당상굿 등에서 산신숭배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의 포용성과 불교계의 어려운 상황 등의 이유로 민간신앙이었던 산신이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불교에 수용되고, 산신이 점차 산신각의 형태로 변화해 신도들의 자식과 재물을 비는 산신기도의 장소가 되었다. 복과 수명을 빌고 재물과 자식의 점지를 바라는 사람들의 욕구를 반영해 사찰 내에 산신(山神), 독성(獨聖), 칠성(七星) 등을 모신 전각을 세웠고, 산신 역시 불교 내에서 독립적인 신앙을 이루었다. 이는 불교 본연의 모습과는 다소 동떨어진 신앙형태이다.
1960년대 말 불교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조계종에서는 이렇게 이어진 조선시대 불교의 산신신앙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산신신앙은 한국불교의 신앙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는 민중이 요구하는 불교의 종교적 역할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