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주지 중현스님을 비롯한 증심사 사부대중 10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생전예수재 회향을 원만하게 봉행했다. 살아 있을 때 미리 공덕을 닦아 사후 명복을 빈다는 이날 의식은 선재사 주지 진훤스님의 집전으로 여법하게 법식대로 봉행했다. 회향의식은 생전예수재가 인연한 연유를 밝히는 의식을 시작으로, 불법승 삼보님과 시왕님, 사자님들을 청하고 공양을 올리는 의식, 관음시식, 법문, 함합소 읽기, 도량요잡 소전의식 등의 순서로 거행되었다.
왼. 생전예수재 의식 중 시왕님과 권속 등을 청함
오. 북치며 의식 중인 종문스님
왼. 관음시식
오. 함합소 읽기
주지 중현스님은 회향 법문을 통해 “수행은 육바라밀이다. 복잡한 생전예수재 의식을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열심히 수행하겠다’는 다짐을 되새기기 위함”이라며 매 순간 순간의 수행을 당부했다. 법문 후에는 법당에 모셔두었던 함합소를 머리에 이고 대웅전 앞마당에서 요잡을 돌았다. 이어 소대에서 함합소를 소전하며 봉송의식을 마쳤다.
왼. 생전예수재 회향 법회 주지스님 법문
오.자신이 지은 업의 무게를 상징하는 함합소를 머리에 이고 도량요잡
왼. 감재사자(監齋使者) ‘감재’란 ‘살피고 다스린다’는 의미로, 사후 우리가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저승사자다.
오. 직부사자(直符使者) ‘직부’란 ‘가서 전한다’는 의미로, 사람이 죽었을 때 염라대왕을 비롯한 지옥의 왕의 명을 전하는 전령을 보내어 명부(冥府)로 오는 낯선 길을 인도하게 한다.
나를 위한 수행, 생전예수재
모든 종교 의례는 살아 있는 사람이 행하는 의식이다. 그 중에서도 불교 의례는 죽음과 관련된 의식이 대표적이다. 불교교리 중 육도윤회(六道輪廻)는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 이후의 새로운 탄생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결국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바람은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거나 최종적으로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기도로 이어진다. 천도의식의 형식은 칠칠재(七七齋)가 대표적이다. 49일간 행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칠칠재라고 불린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칠칠재로는 생자를 위한 생전예수재, 망자를 위한 사십구재, 고혼을 위한 천지명양수륙재가 있다. 망자를 위한 사십구재는 지금도 각 사찰마다 널리 행해지고 있는 의식이고, 고혼을 천도하기
위한 천지명양수륙재는 생전예수재와 더불어 윤달에 널리 설행되고 있다.
윤달이 돌아오면 설행하는 생전예수재는 과거, 예수재(預修齋)·시왕생칠재(十王生七齋)·예수시왕재(預修十王齋)·생전시왕재(生前十王齋)·생전발원재(生前發源齋)·생재(生齋)·생칠재(生七齋)·예수대례(預修大禮)·예수무차회(預修無遮會) 등의 명칭으로 불려왔다.
우리는 늘상 예수재를 지내왔지만 생전예수재의 유래와 예수재를 치르는 의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웠다. 계묘년 생전예수재를 맞아 생전예수재의 유래와 역사, 절차에 대해서 다뤄보았다. 생전예수재의 유래 조선전기 육화스님이 편찬한 <예수천 왕통의>에서 전하는 생전예수재의 유래는 크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으나 주요 내용만 설명하고자 한다.
생전예수재의 유래
조선전기 육화스님이 편찬한 <예수천 왕통의>에서 전하는 생전예수재의 유래는 크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으나 주요 내용만 설명하고자 한다.
- 북인도 유사대국(遊沙大國)의 병사왕(甁沙王)이 재위 25년 동안 예수시왕생칠재(預修十王生七齋)를 49번이나 올렸으나 시왕의 종관들과 그에 따른 권속들의 명목(名目)을 몰라 명사들의 숨은 고통을 위로하지 못해 저승으로 갔다. 억울함에 다시금 돌아와 예수시왕생칠재의 35편을 올바르게 봉행함으로서 이후 미륵대성을 친견하고 수다원을 증득해 성자가 되었다.
- 당나라 태종은 신하인 부혁이가 죽었다는 부음을 듣고 <승만경>에 근거하여 명계전(冥界錢)인 개팔천(開八天)을 주조해 예수재를 베풀었다.
- <승만경>에 이르기를 세존께서 지부에 다니시는데 아난이 종이산을 보고 여쭈었다. “어찌하여 종이산이 생겼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섬부주 사람들이 종이로 돈을 만들어 명부시왕에게 바쳤는데 지전이 법답게 만들어지지 않아 받지 않고 여기에 버렸기 때문에 종이산이
된것이다.”라고 하셨다.
덧붙여 명부에서 빌려온 수생전(壽生錢)을 환납해야만 18종의 재앙들을 피해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더불어 명부의 돈인 개팔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앞면에 개팔천을 새겨놓고 뒷면에는 상평통보를 정교하게 그려 넣어 금색과 은색으로 인쇄하면 된다고 옛문 헌에 근거하여 설명했다. - 삼장법사 현장스님이 구도행각을 하던 중에 대장경을 열람하다 <수생경>을 발견했다. 그 중 12생의 띠가 있어 그 경을 번역하여 많은 중생들에게 전함으로 이후 예수재를 봉행해 큰 이익을 얻게 했다.
이처럼 <예수천왕통의>에서는 생전예수재를 베풀게 된 내력을 서술하고 명부의 판관들에게 예수재 설행을 알리는 소문, 단에 올리는 물품, 종이 돈 만드는 법, 각자 태어난 해의 12지에 따른 죄의 분량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생전예수재의 유래를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남섬부주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명사에서 수생전(受生錢)을 각각 빌려 썼으니, 생전에 미리 닦아서(예수재) 지부(地部)의 창고에 다시 갚아야 신변의 열여덟 가지 재액을 면하고 삼세의 부귀와 길상을 뜻한 바대로 얻을 것이다. 남섬부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의미하고 명사는 명부의 담당관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명부의 담당관청에서 생명의 기간에 해당하는 돈, 즉 수생전(壽生錢)을 빌렸으니, 죽기 전 생전에 그 만큼의 돈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횡재를 면하고 복덕을 얻을 수 있으므로 생전예수재를 지낸다는 것이다.
왼. 태산대왕은 죽은 사람의 일곱째 칠일(49일)을 관장한다. 염라대왕의 서기(書記) 역할을 맡으며, 기록된 바대로 선악의 경중에 따라 죄인이 태어날 곳을 정한다. 이 왕은 거해지옥을 다스리는데, 여기에서는 철산(鐵山) 사이에 죄인을 끼워놓고 압사시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오. 열 명의 대왕 가운데 마지막 왕인오 도전륜대왕은 중생의 어리석음과 번뇌를 다스리며 죽은 사람의 삼주기(三週忌)의 일을 맡고 있다. 망자(亡者)는 죽은 후 여러 왕을 거치며 그 죄를 심판 받고 최후로 오도전륜대왕 앞에 이르러 다시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오도전륜대왕은 흑암(黑暗)지옥을 다스린다. 죄인이 화염에 싸인 채 지옥문에 갇혀 있는 모습과 법륜대(法輪臺) 재판이 끝나 축생, 아귀, 인간 등으로 다시 태어나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생전예수재의 역사
생전에수재는 불교의 지옥사상과 도교의 명부시왕 사상과의 결합을 통해 확립되었다. 중국에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도교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교의 태산신앙은 불교의 전래 이후 불교경전이 한역되면서 불교의 지옥사상과 결합하며 불교경전에서도 태산지옥이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남북조 시대에 이르면 지옥의 지배자인 ‘야마’를 음역한 ‘염라왕’과 중국 고유의 태산부군이 결합하여 중국의 지옥사상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던 태산부군이 지옥의 관념으로 변모되면서 염라대왕보다 하위에 위치해 명계의 판관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불교의 지옥신앙은 고대인도 브라만교의 업사상과 응보의 개념에서 비롯되어 정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시왕의 명칭은 인도나 불교에는 없었던 것으로 지옥사상이 중국에 전래되면서 도교의 시왕사상과 결합하며 정립되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생전예수재 시원을 고려시대 혹은 조선
중기로 보고 있다.
1003년, 궁성 서북 모퉁이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다. 1102년, 흥복사 시왕당(十王堂)이 완성되었으므로 태자에게 명하여 분향하고 왕이 후비와 함께 행차하여 낙성하였다_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에는 시왕사라는 사찰이 건립되고 시왕도와 지장시왕도가 조성되는 등 시왕신앙이 더욱 구체화되고 성행하게 된다. 또한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이 고려시대 해인사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조선전기 세종과 명종실록에는 시왕재(十王齋)나 소번재(燒幡齋)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처럼 시원은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로 보고 있으나, 실제 설행한 기록은 조선 명종대에서부터 보인다.
문정왕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허응 보우(1515~1565)스님은 청평사에서 생전예수재를 설행하면서
<예수시왕재소(預修十王齋䟽)>를 남겼다.
삼가 저(나암 화상)에게 명하여 청평도량으로 가서 절차에 맞는 의식에 따라 공경히 생전예수재를 설행하도록 하였습니다. … 엎드려 바라건대, … 비록 우리들의 죄가 산처럼 쌓였더라도 우리의 고통이 눈처럼 녹게 하시고, 과보가 다 없어지는 저녁에는 함께 아미타불을 뵈옵고, 목숨을 마치는 아침에는 극락세계에 함께 태어나게 하소서. _ 〈예수시왕재소〉
조선후기 임란 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현실생활의 도피와 내세에 대한 열망, 지옥구제에 대한 바람이 생겼다. 그리하여 삶에 지쳐 희망을 잃은 민초(民草)를 위해 생전에 미리 공양하고 재를 올려 복을
닦음으로서 사후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을 면하고자하는 명부의 구주인 지장보살과 시왕에 대한 신앙이 크게 성행하며 생전예수재를 봉행하기에 이른다. 19세기 후반 <동국세시기>에서는 봉은사에서 윤달에 하는 행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봉은사에서는 윤달이 되면 장안의 부녀자들이 몰려들어 많은 돈을 불단에 놓고 불공을 드린다. 이 같은 행사는 달이 다가도록 계속된다. 이렇게 하면 죽어서 극락에 간다고 믿어 사방의 노파들이 와서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린다. 서울과 그 밖의 다른 지방의 절에서도 이런 풍속이 있다. _ <동국세시기>
이 기록에서는 예수재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기록에서 ‘달이 다 가도록 계속 된다.’는 표현은 그 의식이 칠칠재로 설행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생전예수재는 고려 조선시대를 이어온 불교 신앙의 표현이자 민간에서 행해져 온 전통 문화이다.
더군다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생전예수재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라진 불교 전통이다. 그 설행의 주체도 조선 전기에는 왕실이었으나 차츰 일반 백성으로 확산되어가다가 유교적 의례가 정착하면서 왕실에서는 폐지된 반면에 민간 사찰에서 계속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의식이다.
생전예수재의 절차
예수재의 절차는 조전점안(造錢點眼)으로 만든 금은전을 경전과 함께 시왕단에 바친 다음, 맨 먼저 사자(使者)를 청해 공양을 올린다. 명부세계의 성중을 예수재에 청하려면 사자를 통해 초청장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어 상단과 중단의 성중을 차례로 모셔 공양을 올리고, 하단으로 이어진다. 예수재는 산 자들이 주인공이기에
하단의 존재는 영가가 아니라 명부에서 파견된 여러 권속들이 해당된다.
동참재자들은 경전을 봉독하고 법주가 금은전과 경전 헌납으로 생전의 빚을 갚았음을 고한다. 그리고 동참재자의 이름과 주소, 갚아야 할 경전 수와 금액이 적힌 함합소(緘合疏)를 불태우는 소전의식으로 빚을 갚았음을 증명하게 된다.
<글 출처>
금강스님, [기고] 생전예수재의 역사와 배경
노명열, 현행 생전예수재와 조선시대 생전예수재 비교 고찰 : 의식 절차와 음악을 중심으로
이종수, 조선시대 생전예수재의 설행과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