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운명과 욕망 사이 – 운명을 믿습니까? (2)

2019년 8월 18일 일요법회

욕망과 현실 간의 간극이 운명론적 사고를 부추긴다.

사람들은 운명을 찾습니다. 나와 관련된 일이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은 궁금해 하고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름이 가고 나면 가을이 옵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예측했다고 해서 용한 점쟁이입니까? 아닙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내가 ‘내일 오후 3시 스타벅스 종로점에서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카페라떼를 시킬 것이다’라고 예측했다고 칩시다. 설령 그게 맞다고 해도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고, 몰라도 아무 상관없는 미래입니다. 이런 것으로 사람들은 운명을 찾지 않습니다.

한편 나와 관련된 일이라 하더라도 통제 가능한 범위에 들어 있는 나의 미래는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저녁에 사형 스님들과 저녁을 먹을 것이다. 왜? 약속이 되어 있으니까’라는 것은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입니다. 이런 것 역시 운명이라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반면 ‘내일 내가 짝사랑하는 남자와 저녁을 먹을 것이다’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녁을 먹는다는 것은 앞의 예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여성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짝사랑하는 남자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짝사랑하는 남자와 저녁을 먹고 싶다는 미래는 어디까지나 이 여성의 희망일 뿐입니다. 이 경우, 이 여성이 희망하는 미래는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은 자신의 희망이 정말로 실현될지 궁금합니다. 그러면 점쟁이를 찾아가 ‘그와 잘 될 수 있을까요? 내일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겁니다. 점쟁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죠.

‘내 딸이 시험에 떨어질까 붙을까?’, ‘군대에 있는 아들이 건강하게 있을까?’ 이것들은 나와 관련되어 있지만,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사안입니다. 미래를 궁금해 하는 것은 어떻게든 나의 통제 범위 안에 내가 원하는 미래가 들어오게 하려는 마음의 산물입니다. 한마디로 욕심이지요. 인간이 운명을 찾을 필요도 없고 찾을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된 미래를 갈구하는 이유는 나의 욕망과 현실 사이에 큰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와 내가 원하는 미래가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 간극을 메우고 싶은 마음이 내가 원하는 결정된 미래를 갈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즉 공인된
큰스님이나 용한 점쟁이가 내가 원하는 미래를 보장해주면, 비록 내 능력 밖의 일이지만 철썩같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대한 운명론적, 결정론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운명에 대한 믿음을 미래에 대한 비젼으로 바꾸자.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욕망,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욕심이 지배하는 세상, 욕계(欲界)입니다. 욕망이 없고 무기력에 빠진 사람은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욕심이 우리 삶의 동력입니다. 다만 ‘욕심’ 그 자체와 욕심대로 했을 때의 ‘보상’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욕은 꼭 필요합니다. 종족 유지를 위해서는 섹스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족 유지가 되지 않아서 인간은 멸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적 쾌락이라는 것은 성욕에 대한 보상입니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성욕이 너무나 중요하니까 거기에 큰 보상이 뒤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 쾌락에만 매달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성욕까지 터부시하고 배척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욕망은 욕계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를 부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운명을 갈구하는 것도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라는 삶의 동력 때문입니다. 다만 욕망과 욕망에 따른 보상을 구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하듯이, 욕망과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운명적 믿음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근거 없는 믿음, 운명에 대한 믿음을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전망으로 바꿔야 합니다. 욕망을 의지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새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할 때 어떻게든 사업을 성공시키고 싶은 것이 당연한 욕심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술술 잘 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만 믿고 맨날 놀러 다니기만 한다면 사업이 잘 됩니까? 성공하려면 고민하고 연구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사업 성공에 대한 내 안의 욕망이 의지가 될 때 욕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조직이나 사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사회를 이끌어가는 집단에서 비전을 제시하여 내부 구성원들이 이를 공유하고 각자가 의지를 불태우면 그 조직은 비전대로 갈 가능성이 큽니다.

가까운 예로 202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경제라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평화경제라는 비전을 공유하고 각 개인이 평화경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면 문재인 대통령의 비전 제시는 성공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운명을 믿는 것보다 더 현실적입니다.

욕망을 알아야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송광사 살 때의 일입니다. 그 해가 몇 년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엄청나게 가물었던 여름이 있었습니다. 하안거를 지내는 스님들끼리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마을의 면장이 절에 올라와 주지스님을 찾아뵙고는 절에서 기우제를 지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절의 입장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는데 비가 안 오면 체면을 구기는 것이고, 그렇다고 면장까지 올라와서 부탁하는데 박복하게 거절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주지스님께서는 기우제를 지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기상청에 연락해서 주암면 일대에 비가 올 확률이 높은 날짜를 받은 후 그 날짜에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기우제가 끝날 무렵 완전히 해갈될 정도는 아니지만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기우제를 지내니까 비가 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기우제 그 자체를 놓고 보면 말 그대로 도박입니다. 요즘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비가 내리기를 갈구하는 간절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지스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욕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파악하고, 조금이나마 그 욕망이 실현될 수 있는 날을 받아 행사를 치른 것입니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알기만 할 뿐 아니라 실현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방법을 찾는데서 그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운명을 믿고 운명을 따르고 숙명적인 사고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입니다. 운명적 믿음에 마음을 뺏기기 보다 자신의 욕망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관찰하는 것이 미래를 앞당기는 가장 믿을만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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