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삼재풀이는 하셨나요?

2021. 1. 15 초사흘법회

#1

“스님, 증심사는 법회도 유튜브로 생중계하고 증심사 뉴스도 만들고 하니까, 이번에 삼재기도 광고같은 것도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리면 어떨까요?”
“광고를 한다고요?”
“예. 스님이 나오셔서 삼재기도에 대해서 설명도 하면 좋을 거 같은데요.”
“뭐… 나쁜진 않네요. 1분 이내로 만드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 같기도 하고…”

삼재기도를 광고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어서 적잖이 놀랐다. 사실 삼재기도와는 잊지 못할 인연이 있다. 처음으로 말사에서 소임을 보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이 바로 삼재기도였다. 처음 말사에 부임해온 나에게 신도들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부적을 달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왜 나에게 부적을 달라고 하지?, 절이 무슨 점집이나 철학관도 아닌데…’

삼재기도는 대개 입춘 즈음에 한다. 하필이면 내가 처음 말사에 온 시기도 대략 1월 말쯤이었으니 막 삼재기도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강원 졸업하고 선방 다니다가 큰절에서 소임 본 것이 전부였던 나는 말사 소임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말사에 오자마자, 신도들이 내게 처음으로 요구한 것이 부적을 달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종무원도 없는 시골의 작은 절이라 삼재가 뭔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삼재기도 접수를 내가 직접 받아야 했다. 스님들의 수행을 주로 하는 큰절에서는 접할 일이 없는 것들이다.

불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삼재 풀이를 왜 절에서 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골
어르신들에게, “이런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니 할 필요 없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그럴 용기도 없었다. 당시 나는 아는 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낯선 곳에 혼자 내던져진 상태였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신도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속으로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광주에 있는 불교용품점까지 찾아가서 삼재풀이에 필요한 것들과 부적을 구입하고, 삼재기도는 어떻게 하는지 경험 있는 스님들에게 물어서 말사 부임 첫해의 삼재기도를 그럭저럭 넘겼다.

그런데 어느새 삼재기도 광고를 제안받는 처지가 되었다. 사중의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있다 보니 기도수입에 대한 관심이 없을 리 없다. 더구나 요즘같은 코로나 시대엔 더더욱 절에 신도님들이 오질 않으니 어떻게든 기도를 알릴 묘책을 고민해야 한다. 떨떠름한 기분이 마음 한켠을 차지하긴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절로 돌아와 혹시 삼재기도 광고를 하는 사찰이 있나 싶어 유튜브로 ‘삼재’라고 검색해보았다.

〈삼재 알려드립니다〉, 〈삼재 때문에 힘든 분들 보세요〉, 〈삼재와 아홉수 고비를 잘 넘기는 법〉 이런 제목의 유튜브 영상들이 주루룩 올라왔다. 한결같이 하얀 옷을 입은 분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스님들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내내 떨떠름했던 마음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아무리 절집 살림이 힘들다 해도 이건 아니지 싶어, 그 자리에서 곧바로 검색한 화면을 캡쳐해서 홍보담당 직원에게 보냈다. 삼재 광고는 하지 말자는 메시지도 함께 보냈다. 홍보담당직원에게서 곧바로 답글이 왔다. “ㅎㅎㅎㅎ 네

#2

사대부들이 세운 나라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고 불교를 억압했다. 그러나 불교는 이미 천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민중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해왔다. 그런다고 쉽사리 사라질 불교가 아니었다. 외래종교였던 불교는 특유의 개방성과 관용정신으로 한국의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한민족의 정서 속에 스며들었다. 마치 솜에 물이 배어들 듯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신라가 처음 불교을 받아들일 때 약간의 충돌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갈등도 없었다.

산신각, 칠성각 같은 민간신앙을 위한 전각이 절 속에 자리하였고, 백성들은 입춘, 칠월 칠석, 동지 같은 전통적으로 중요한 날이 되면 자연스럽게 절을 찾았다. 조선시대의 권력자들은 불교를 배척하였지만, 불교는 민간신앙을 흡수하며 백성들과 동화되었다. 심지어 궁궐 안에서 불교는 면면이 이어져 내려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통해 한국의 불교를 통제하였지만, 경허 스님, 만공 스님, 효봉스님 같은 걸출한 스님들이 불교의 맥을 이어왔다.

한편 조선은 불교를 배척함은 물론, 민간신앙도 저급한 사상 즉 미신으로 취급했다. 사대부들은 무당을 백정, 창기와 함께 천민으로 분류하였다. 이런 현상은 일제강점기 그리고 서구식 교육이 지배적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민간신앙은 공식화되거나 주류가 되기보다 사람들 내면에 깊숙이 들어가는 방식으로 현대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여기에 더하여 전통적인 민간신앙이 불교 속으로 녹아 들어감은 물론, 불교는 민간신앙에게 종교적 위력 내지는 조직성을 제공하여 민간신앙의 생명력을 더욱더 강하게 하였다.

실제로 과거 어떤 절에 잠깐 있을 때, 절 가까이에 용하다는 무당의 굿당이 있었다. 정작 절은 한옥 스타일로 지은 허접한 시멘트 건물이었지만, 굿당은 목재를 써서 제대로 지은 웅장한 한옥이었다. 가끔 굿당에서 북과 징을 치며 뭔가를 하곤 했다. 하루는 산책을 하다가 그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니 반야심경을 읽고 있었다. 상당히 의아했지만 불교와 민간신앙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또한 80년대 들어 존립의 위기에 처한 민간신앙은 불교종단에 속한 사찰로의 등록이라는 방식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그 결과 많은 군소 불교종단이 만들어졌고, 기존의 불교와 민간신앙간의 경계는 더욱더 애매모호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래저래 불교와 민간신앙은 오랜 세월 불원불근의 사이를 이어왔다. 한국인의 특징적 신앙현상으로 “생각은 불교적으로 하고, 생활은 유교적으로 하고,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무속인을 찾는 다중적 신앙형태를 보인다”라는 말을 본 적 있다.

장경철 교수는 한국 종교현상의 특징으로 모든 종교의 민간신앙화를 말하고 있다. 즉, “한국사회의 밑바닥에는 토속신앙인 민간신앙이 있으며, 그 위에 일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불교신앙이 얹혀있고, 그 위에 유교, 기독교 신앙과 서구사상이 곁들여 있다. … 한국의 민간신앙은 외래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후에는 외래의 것을 표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내면으로 숨어버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언제까지나 소멸되지 않고 내면에 살아 있어 결국은 외래종교를 무속화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민간신앙과 불교 간의 천년이 넘는 오랜 관계를 되새기다 보면, 처음 말사 주지 소임을 보던 내가 당황해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첩첩산중의 불교와 사람들이 북적이는 저잣거리의 불교는 모양도 색깔도 심지어 맛도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나 기독교 같은 고등종교든 아니면 신앙의 단계에 머물러 교리나 조직화에서 고등종교에 미치지 못하는 민간신앙이든 핵심은 믿음에 있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 확고한 신념을 얻어서 안정된 마음을 찾고, 영원한 존재에 의지해서 인생의 안락함을 구하고,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해결해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깊은 철학과 높은 도덕을 갖추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하긴 전세계적으로 종교의 순위를 매기면 토착종교라 통칭되는 것이 5위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다. 인간은 어찌보면 종교적 동물이다. 인간에게 결여되었다고 느끼는 그 무엇으로 인해 인간은 종교를 찾는다. 그것을 뭐라 부르든 인간을 성숙시켜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다. 그리고 어떤 형식, 어떤 방식으로든 민간신앙이 종교와 무리없이 융화할 수 있는 이유는 각자의 본질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3

얼마 전, 한 젊은 주부와 상담한 적이 있다. 이웃 종교에 다니는 그녀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의 행동이 불안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하루는 우연한 계기로 친구를 따라 점집에 갔는데, 점집에서 아이의 사주가 아주 좋지 않으니, 아이를 절에 팔아야 한다고 했다. 팔 수 없다면 절에 크게 보시라도 하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예언을 들은 사람처럼 그 젊은 주부는 그 날 이후로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다 근거 없는 말이라고 무시했지만, 가슴은 이미 점집 보살의 말에 붙잡혀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이 불안해서 점집 보살의 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평소에 마음을 건강하게 단련하면 불안 같은 것에 마음이 아파하질 않는다. 평소 본인의 종교생활을 게을리했다면 다시 부지런히 하기 바란다. 당신이 믿는 신에 의지하는 것이 당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길이다.”라고 충고하였다. 다행히 그 젊은 주부는 올 때의 어두운 얼굴과는 달리 밝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민간신앙이 이 젊은 주부의 불안감에 쇄기를 박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는데 그녀의 종교가 일익을 담당하리라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이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어떤 보시도 받질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만 있다면, 종교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조들은 지혜로웠다. 달리 지혜로웠던 것이 아니다. 겸손한 것이 곧 지혜로움이다.

자연과 우주 앞에 자신을 낮추었다.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마음의 안정, 인생의 안락함, 삶에 대한 희망 같은 것들이다. 대신 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사로운 욕망을 버리고 조건 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같은 욕망의 격전 대신에,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의 집행 이전에 높은 도덕 정신과 윤리적 실천을 요구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자신을 낮출 수만 있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민간신앙이라고 업신 여기는 것도 잘못된 태도이지만, 미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AI가 일상화된 과잉정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정작 따로 있다.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오직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고등종교나 민간신앙을 이용하는 것이다. 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외면하면서 종교에게 요구만 하는 행동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막연한 존재에게 기도하는 마음은 곧 자신을 무한하게 낮추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찮은 민간신앙이라고 무시하는 마음은 내 생각이 옳다는 자만심, 과학을 미신처럼 떠받드는 과학숭배주의에서 비롯된다. 진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과 함께 한다.

#4

다시 삼재기도 시즌이 돌아오고 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삼재기도를 접수했다. 심지어 30대 초반의 지인도 자신이 날삼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올해가 나가는 삼재이니 올해부터는 일이 잘 풀릴 거라는 희망섞인 말을 내게 했다. 내심 살짝 놀라긴 했지만, 그만큼 우리 한민족의 영혼 속에는 수천 년을 면면이 이어 내려온 민간신앙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일 테다. 말사 주지 소임을 처음 시작하던 때를 돌이켜 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종교는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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