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관용寬容

2019년 8월 7일 수요야간법회

최근,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비화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가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역풍을 맞았습니다. ‘세종대왕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성군’이라는 이미지를 영화에서는 박탈했습니다. 세종으로부터 카리스마를 벗겨내면서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것은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일반인들이 가진 세종대왕에 대한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한글창제에 신미대사라는 승려가 역할했다는 스토리를 두고 일부 타종교를 중심으로 역사왜곡 논란을 야기시키며 영화 보이콧 등의 반대 움직임들이 나타났습니다.

관용. 프랑스말로 똘레랑스(tolérance)라고 합니다. 관용은 내가 싫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타인의 주장을 용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타인이 자기 주장을 할 권리는 보장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있을 때 관용이 통용되고, 관용이 전제될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가능합니다. 관용의 입장에서 봤을 때 설령 <나랏말싸미>에 나오는 세종대왕의 이미지가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한글창제에 숨은 조력자가 있다는 영화적 상상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영화를 내려라’, ‘해외 배급을 하지 말라’, ‘상영관을 줄여라’라고 주장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요?

지금 우리는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유교적 윤리나 도덕이 해체되고 모든 것을 법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가치관으로 사회를 재구성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들에게 중요한 가치관이 바로 관용의 정신입니다.

똘레랑스는 첫 번째,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에 대한 존중입니다. 타인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입니다. 핵심은 존중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원에 가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 가면 ‘존중하시오. 존중하게 하시오.’라고 써놨다고 합니다. 잔디를 존중하면 당신도 존중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똘레랑스의 핵심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가령 이주노동자 관련 이슈가 있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받으려면 먼저 외국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외국인들에게도 내국인들과 같은 평등한 기회를 보장해줘야 합니다. 관용의 정신에 입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존중을 받으려면 상대방이 믿는 종교를 먼저 존중을 해야 합니다. 내 종교는 존중받고 싶으면서 상대방의 종교는 무시한다면, 상대방 역시 내가 믿는 종교를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깁니다. 이것이 관용의 정신입니다.

관용 정신의 두 번째는 약자에 대한 보호입니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습니까? 힘으로 겨룬다거나 숫자로 밀어붙여서 다수결 대로 따르라고 하는 것은 존중하는 게 아닙니다. 존중은 폭력이 아닙니다. 합리적인 토론으로 결론을 봐야 합니다. 내 주장을 설파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상대방이 정 굽히지 않으면 누군가는 포기합니다. 힘으로 억누르거나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의 힘이 엇비슷하다면 토론을 해서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겠지만 한쪽의 힘이 훨씬 약할 때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똑같은 조건을 주고 똑같은 경쟁을 하자고 한들 이것은 평등한 것이 아닙니다. 운동장을 바로 세운 후에 똑같이 경쟁을 하자고 해야 평등한 것입니다.

성(性)이나 국적 문제 등에서 권력은 법적으로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약자, 소수자, 가난한 자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약자가 존중받으려면 약자에 대한 제도적인 보호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들은 사회, 정치적인 문제 아니냐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관용은 우리 개개인에게도 중요한 가치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아는 사람끼리는 어떤 문제든 통용되지만, 잘 모르는 사람끼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합리적인 지성을 갖춘 개인이 성장하기 힘듭니다.

어떤 사안이 있을 때 “나는 당신과 생각이 좀 다른데요.”라고 말하면 어떻습니까? 섭섭합니다. 서운합니다.
“우리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합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합리적인 개인이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나홀로족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똑똑해서 혼자 사는 합리적인 개인 아니야?’ 그러나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합리적 지성으로 무장한 개인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자발적인 개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거노인, 기초수급자, 취준생, 실직자… 저마다의 이유로 집단 속에서 자의 반 타의 반 튕겨져 나온 사람들도 상당수입니다. 튕겨져 나온 사람들은 방치되기 십상입니다. 관용의 부재는 지금 우리들 개개인을 힘들게 하고 있는 내밀한 고민과 고통, 고충과 결코 멀지 않습니다.

관용의 정신이 통용되지 않는 이러한 폐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결국은 우리 스스로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낯설고 불편하더라도 나 스스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다를 때는 토론을 통해 자기주장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면 ‘어 맞아’ 하고,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저 멍청이’ 하고, 그래서 당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그냥, 누가 그러던데..’ 라고 얼버무리면 안 됩니다.

개인 간 끈끈한 유대는 우리 사회의 큰 강점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것을 표현하고, 서로 토론하여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우리 사회에서 건강한 개인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많이 생각하고 활발하게 토론합시다. 그런가 보다 하지 말고 내 생각을 스스로 다듬는 연습을 합시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도 그 자체로 용인하고 인정합시다. 그것이 관용의 정신을 개인의 삶과 사회 속에 구현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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