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종교는 문화다2

2019년 11월 27일 초하루법회

왜 우리나라는 일상에서 종교가 문화로 실현되지 못할까요? 과거 서양에서 종교는 삶의 모든 것을 관장했습니다. 중세까지 삶의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역할을 종교가 했습니다. 그러나 근대 들어 창조의 원리를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파헤치게 되었습니다. 종교에서 담당하던 진리를 추구하는 역할을 과학이 가져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중세 이후로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신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철학이 대두됩니다. 중세시대에는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은 사악한 욕심이라고 종교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중세 시대가 지나면서 정당한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경제활동이 종교에서 또 떨어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도 종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이렇게 많은
부분이 떨어져나가고 현재는 오로지 신앙, 믿음 하나만 남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사상이 도덕과 윤리를 지탱해줬는데 전쟁을 몇 번 겪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돈 버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도덕과 윤리를 따질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종교를 신앙으로써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종교는 우리 자식 합격시켜달라는 식의 기복신앙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영적 체험만을 강조하는 식이 되어 일반인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 밀접하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마을공동체가 무너진 후 도덕이나 윤리 대신에 우리들을 지탱하는 것은 돈과 능력과 법입니다. 옛날처럼
태어나 죽을 때까지 미우나 고우나 한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됩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 구할 수 있습니다. 능력은 곧 돈입니다. 그러니 자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돈 많이 벌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전 세대가 가지고 있던 충효사상에 기초한 도덕 윤리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남에서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요즘 우리들의 윤리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 우리에게 종교가 없다고 하면 염치라도 있어야 합니다. 염치는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부끄러워 할 줄 알고 남에 대해서는 체면을 차릴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번듯해야 하며 정신적으로 내 자신을 단련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결국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미 답을 하셨습니다. <금강경>은 수보리의 질문과 부처님의 대답으로 이뤄졌습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이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들을 한 마디로 줄이면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다 제도하겠다는 마음으로 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비심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느 한 중생도 제도하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즉 공성을 체득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두 가지로 제시하셨습니다. 자비심과 공성입니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천 지침도 설했습니다. 오계(五戒)입니다. 살생, 도둑질, 사음, 거짓말, 음주를 하지 않는 것이 자비심과 공성을 실천하는 지침입니다. 오계는 심오한 뜻을 파헤치기보다 액면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얀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모기를 죽이지 않고 쫓아낸다고 합니다. 송광사 강원 시절, 새벽예불을 하면 모기가 엄청나게 물어도 모기를 잡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큰방에서 스님들이 모여 독경을 하는데 모기를 쫓으려고 손을 휘둘렀다가 본의 아니게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살생을 했구나 하며 자책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이제는 희미해진 감정이기도 합니다만, 미얀마 사람들은 그게 일상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문화입니다. 따로 경전이나 계율 혹은 큰스님 말씀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그저 부처님이 살생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살생은 안 하는 것이고 그래서 모기도 웬만하면 잡지 않습니다.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의 오계가 우리들의 도덕과 윤리가 되지 못하다 보니 모기 한 마리쯤 살생하는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이게 종교가 일상에 파고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차이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미얀마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시 받는 사람은 보시하는 사람의 복을 지어준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비구는 복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구는 복을 지을 수 있는 밭이라는 말입니다. 미얀마에서는 일반인들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불교적인 공양, 보시문화가 사회 전반적인 문화로써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한 현상입니다.

우리는 미얀마를 가난한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보면 가난합니다. 그런데 미얀마가 7년 연속, 세계에서 자국 내 기부를 제일 많이 하는 나라 1위로 꼽혔다고 합니다. 기부, 그러니까 보시를 많이 한다는 것은 1억 원을 벌어서 100만 원이라는 큰돈을 보시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자기가 번 것 중에 보시할 수 있는 만큼을 일상적으로 보시한다는 의미입니다.

마하나마라고 하는 사람이 부처님께 질문했습니다. “미친 코끼리와 미친 사람, 미친 수레가 항상 우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나는 이 미친 것들과 함께 살고 함께 죽으면서 부처님의 법과 승가를 생각하기를 잊어버릴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어서 어디에서 태어날까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는 불자인데 이 세상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도 비슷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큰 나무가 동쪽으로 기울어있을 때 그 밑동을 베면 어디로 넘어지겠는가?”
“동쪽으로 넘어집니다.”
“너도 그와 같아서 목숨을 마친 뒤에도 나쁜 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너는 오랫동안 부처와 법과 승가를 생각하기를 닦아 익혔고 오랫동안 믿음과 계율, 보시를 닦아 익혔기에 목숨이 다한 뒤에는 과보를 받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또 호수에 빠진 기름단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기름단지를 호수에 빠뜨리면 어떻게 됩니까? 단지가 바닥에 가라앉아 깨지더라도 기름은 위로 떠오릅니다. 이처럼 불법승 삼보를 믿고 계율과 지혜로써 살았다면 목숨이 다한 뒤에는 단지 속 기름이 물 위로 떠오르듯이 비루하고 나쁜 곳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더라도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마하나마를 안심시킨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불교는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를 기복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수행의
도구로 삼고, 어떤 이는 교리로 공부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삶 속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절에 들어올 때는 불자고 절 밖으로 나가는 순간 불자라는 생각이 지워지면 그건 불자가 아닙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오계는 좋고 싫은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하니까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하나마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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