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불교의 선악관 – 선과 악 그리고 죄2

2019년 3월 9일 초하루법회

그렇다면 불교는 선과 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천수경>에서 힌트를 얻어보겠습니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痴)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지난 세월 제가 지은 모든 악업은 옛적부터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모든 죄업 참회합니다. 이 안에 불교의 선과 악에 대한 생각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악은 무엇입니까? 바로 탐진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탐진치는 세 가지 독입니다. 그중 근본은 치(痴), 어리석음입니다. 무명(無明)입니다.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가장 근본적인 번뇌와 정신적인 고통이 생깁니다.

욕심과 분노는 모두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번뇌입니다. 탐진치가 나를 괴롭히고 우리를 괴롭혀서 그로 인해 행하는 것이 바로 나쁜 행동이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악업(惡業)입니다. 탐진치를 없애지 못하고 탐진치에 이끌려서 하는 행동이 악한 행동입니다.

선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무명에 휩쓸려서 하는 행동들을 참회하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욕심내지 않고,
화내지 않고, 자비롭고 자애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행동입니다. 간단합니다. 불교에서는 선과 악이 너무나 명쾌하게 정리가 되어있습니다. 탐진치로 말미암아 하는 행동은 악한 행동입니다. 탐진치로 인한 행동을 참회하고 반성하며 청정한 마음으로 하는 행동은 선한 행동입니다. 불교에서의 깨달음, 열반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탐진치 삼독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행동 즉 보리심으로 행하는 행동은 선한 행동이요, ‘내가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인 줄 모르고 거기에 이끌려서 하는 모든 행동은 악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선의 원천은 탐진치가 없는 마음. 청정한 마음, 자비심, 보리심이 되는 겁니다.

<천수경>의 십악참회는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하는 참회입니다. 앞의 세 가지는 몸으로 하는 행동, 중간의 네 개는 입으로 하는 행동, 나머지 뒤의 세 개는 마음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행동을 갈고닦는다는 것은 단순히 행동만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행동이 쌓이면 올바른 습관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올바른 습관이 뿌리내리면 나의 성품이 되고 성격이 되는 것입니다. 선업이 완전히 뿌리를 내리면 삼독심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불교적인 선(善)을 실천해야 할까요? 자애로운 마음, 자비로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항상 지니고 유지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방법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싶은 만큼 남도 당연히 행복하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입니다. 또한 자리이타의 마음이란 나만 이로울 것이 아니고 남도 이로운, 그래서 모두가 이로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만 이롭고 나는 괴로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안에 괴로움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나에게 화가 될 것이고, 언젠가 화가 터져 버리면 상대방에게도 이롭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나도 이롭고 상대방도 이로운 자리이타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선업을 키우고 쌓아가는 방법입니다. 선업을 쌓은 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다져져서 성품이 됩니다. 이렇게 내 안에 선업이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면 나는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선악에 대해 “악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인간은 피동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어떻습니까? 불교에서 “악”으로 규정하는 탐진치는 바깥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결국 내 마음 안에 있는 번뇌입니다. 내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악이 생기고 악이 커지고 악이 사라지는 것 모두가 결국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불교에서는 밝음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듯이 선이 있으면 악이 있다고 합니다. 선과 악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밝음과 어둠처럼 서로 의존하는 관계입니다. 동시에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 어디부터가 선이고 어디까지가 악인지 불분명합니다.

현실에서 선과 악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앞뒤 맥락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변한다는 말은 자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변하는 겁니다. 변한다는 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자성이 없습니다. 공합니다. 연기합니다. 즉 선과 악도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연기합니다. 공입니다. 그래서 죄도 역시 실체가 없어서 공하다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죄의 자성 본래 없어 마음따라 일어나니
마음이 사라지면 죄도 함께 없어지네
모든 죄가 없어지고 마음조차 사라져서
죄와 마음 공해지면 진실한 참회라네

불교에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악래선도(惡來善度)라, 악이 오면 선으로 제도한다. 왜? 선과 악이 서로 다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악이 오면 선으로 제도하고 번뇌는 보리로 치유합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끝으로 과거칠불이 공통으로 계율의 근본으로 삼은 게송인 칠불통게를 되새기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합장하시고 함께 독송합시다.


제악막작 (諸惡莫作)
중선봉행 (諸善奉行)
자정기의 (自淨其意)
시제불교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봉행하며

스스로 내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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