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는 실재하는가?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정말 착한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을 잘 다스려서 고요하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주변사람들이 자꾸 나를 화나게 만들고, 열 받게 만들고 말이야. 나만 바보 취급당하면 혼자 아무리 열심히 수행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주변 사람들이 도와 줘야지.”
가만 들어 보니까 틀린 말도 아닙니다. 불자로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안 도와준다는 것. 나를 화나게 만든다는 것이요. 그런데 이 생각은 맞는 생각입니까? 틀린 생각입니까? 이런 것은 화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고 슬픔, 즐거움, 괴로움, 우울,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내게 슬픔만 안겨주고 떠나간 사람’ 내지는 ‘우울한 마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여러분. 생각해봅시다. 누군가 나에게 1kg짜리 화를 주었다면, 1kg 짜리 화를 받은 만큼 화가 나는 겁니까? 과연 화라고 하는 감정에 실체가 있어서, 누가 나한테 화를 줘서 화가 나고, 내지는 아름다운 경치가 나에게 행복감이라는 실체를 줘서 내가 행복한 겁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치 화를 주고받고 슬픔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들은 거친 감정 즉 화나 슬픔 등의 감정에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런 착각을 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근본적으로는 우리들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시계가 있구나, 마이크가 있구나, 저기 사람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듯이 감정도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누가 나에게 화를 ‘주었나’? 우리는 화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게 아니고 상대방에게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잘못했는가?’를 따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누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문제로 인해서 나에게 이런 감정이 일어나는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탓이라고 하면 스스로 아무리 마음의 풍경을 유지하려고 해도 원인 제공자가 눈앞에 보이면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서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생각하면 문제 해결이 훨씬 더 쉬워집니다.
조사스님 말씀에…
“평소에 마음을 아주 고요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은 단지 시끄러운 가운데에서 사용하기 위할 뿐이다.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 힘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일찍이 고요한 가운데에 있어서 공부를 짓지 않음과 같다.” 평소에 고요한 곳에서 열심히 수행을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을 대하면서 골치 아픈 일, 화나게 하는 일,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들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 말도 가만히 보면 좀 애매합니다. 무엇이 고요하고 무엇이 시끄러운지가 정확하게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일차적으로 고요한 장소라고 하면 저 산속에 있는 조용한 선방 같은 곳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고요한 곳은 내 마음이 청정을 이루어서 평화로운 상태, 마음이 거칠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을 실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어떤 감정이 막 요동치지 않는 상태,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우울해하는 감정이 요동치지 않는 상태가 곧 고요한 곳입니다. 시끄러운 곳은 그 반대의 감정이겠지요.
예를 들면 요즘 카페에서 공부를 많이 합니다. 엄청나게 시끄러운데 의외로 공부가 잘 됩니다. 과학적으로 백색소음이라고 해서 오히려 무의미한 잡음 속에서 뭔가 하나에 집중하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생각해서 혼자 조용한 숲길을 산책하면 마음이 평화로울 것 같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새소리, 꽃 핀 모습,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 마음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주변은 조용한 곳인데 오히려 마음이 고요하지 못합니다.
시끄러운 가운데서 마음이 고요하려면
시끄러운 가운데서 마음이 고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평소에 마음이 고요할 때 수행을 꾸준히 반복적으로 해야 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든 옴마니반메훔이든 광명진언이든 상관없습니다. 꾸준히 해서 습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잡한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미리 몇 호선을 타고 어디에서 갈아타면 된다는 코스를 정확하게 봐놓아야 합니다. 서울사람들도 헷갈려하는게 서울지하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하철 타기 전까지는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데 실은 내가 환승할 곳만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청량리에서 신촌으로 간다고 할 때, 1호선 청량리에서 탈 때는 ‘어떻게 하면 신촌으로 가지?’ 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1호선 시청역에서 내린다는 생각만 하면 됩니다. 환승역인 시청역에 내려서는 ‘2호선 시청역으로 가서 신촌에서 내리자’ 이 생각만 하면 됩니다. 이게 서울에서 헷갈리지 않고 목적지를 잘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거친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으로 가는 환승역, 수행
마찬가지로 마음이 거친 상태에서 고요한 상태로 갈 때에도 중간에 환승역을 하나 만들면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화가 막 나거나 우울하거나 슬픔이 밀려오는 어떤 순간에 습관적으로 하나의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 수행은 평소 마음이 고요할 때 열심히 해서 습관으로 익혀두었던 수행입니다. 광명진언, 신묘장구대다라니, 참선 등 어느 것이나 좋습니다. 거친 감정이 일어날 때 그 상태에서만 벗어나기만 하면 문제의 반은 해결되는 겁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내가 평소에 습관적으로 하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본인이 평소에 하던 수행법을 그냥 억지로 하고 봅시다. 하기 싫어도,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억지로 참고 일단 한번 해봅시다. 우울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울증의 제일 큰 문제가 뭡니까? 무기력한 겁니다. 내가 우울한 걸 잘 알고,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는 것도 다 아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이럴 때 내가 평소에 마음이 평온할 때 하던 수행을 하는 겁니다. 평소에 습관적으로 했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상태일지라도 우선 당장 하는 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렇게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참고 하면 평소에 습관적으로 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혼란할 때는 마음의 관심을 현재의 거친 감정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한데 바로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을 고요한 상태로 이끄는 환승역까지 데려다 주는 일입니다. 마음의 환승역을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평소에 고요한 곳에서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