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2019년 7월 3일 초하루법회
죽음이 삶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나이듦에 따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전염병이나 자연재해 등 죽음을 앞세운 자연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온 우리 사회는 어느새 우리의 삶으로부터 죽음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는 사회적, 개인적 인식 속에서 짙어지는 죽음에의 존재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노욕이 되기도 하고 지혜로운 수용이 되기도 한다.
삶과 죽음,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20대 초반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나도 이제 꺾어 50이구나.’ ‘꺾어 50’이란 말은 25살 젊은 친구들이 나도 나이를 제법 먹었다 티내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 문득 ‘나이를 많이 먹었네,
큰일 났네, 아무리 돌아봐도 특별히 한 건 없는 것 같고 마음은 급하네.’ 그런 조급증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10년 뒤, 30대 중반 쯤 돼 가지고 또 한 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난 10년 동안 뭘 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한 게 별로 없습니다. 마치 움켜쥘수록 빠져나가버리는 백사장의 모래처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난 도대체 뭘 하며 살았지? 이렇게 살아도 되겠나?’ 이런 불안한 느낌이었습니다. 또 최근 몇 년 전, 새벽에 문득 잠이 깨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아, 나도 이제 언젠가는 죽는구나.’ 그날 새벽에는 유독 그게 가슴으로 확 다가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이런저런 이유로 인생살이가 고달프면 마음속으로 ‘정말 힘들어서 못 해먹겠다, 그냥 확 죽어버리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죽고 싶다는 것은 실은 사는 게 너무 힘들다 내지는 인생이 왜 내 뜻대로 안 되냐
하는 자기 푸념입니다. 살고 싶다의 간절한 표현입니다.
예순 언저리에서 생각하는 죽음
그런데 60이 다 돼 가는 나이에, 새벽에, 불현 듯,‘아, 나도 언젠간 죽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은 젊은 날의
푸념하고는 다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동안 내 인생에서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죽음이라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마음속의 한 부분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젊을 적에는 ‘지금까지 살아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것이다’ 라는 게 너무나 당연해서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머릿 속에 입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50대만 되도 나름대로 심각한 병들이 심심찮게 찾아옵니다. 암에 걸리기도 하고 저 같은 경우는 자칫 잘못하면 실명할 수 있는 3대 안과질환인 황반변성, 녹내장, 백내장이 한꺼번에 왔습니다. 관리를 잘못하면 10년 안에 실명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실명되는 게 남 얘기가 아닙니다. 또 우리 주변에 위암에 걸려서 위를 잘라낸 사람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별로 환자 티가 안 나는데,
당사자의 경우는 살고 죽는 게 남 얘기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절박한 문제가 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 언젠가가 오늘일 수도 내일 일 수도 한 달 뒤일 수도 있고 10년 뒤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흔히 나이를 좀 먹으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죽는 건 안무서운데 죽을 때 아플까봐 그게 걸려. 안 아프게 죽었으면 좋겠어.” 내지는 “나는 죽는 건 괜찮은데 나 때문에 우리 자식들이 고생할까봐 그게 걱정이라 죽고 싶어도 죽으면 안 돼.” 그러나 죽음은 내 의지하고는 무관합니다. 내가 살고 싶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아무리 죽고 싶다고 해도 죽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죽음이 삶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노욕(老慾)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욕심. 나이를 많이 먹고 약간 치매 기운도 오고 그러면 식욕이 갑자기 왕성해지고 욕심이 많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죽을 날이 멀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겠습니까? 본능적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살려면 잘 먹어야 합니다. ‘대충 먹으면 안 돼, 잘 먹어야 돼.’ 이런 게 노욕입니다.
노욕이라는 것은 젊은이들이 ‘나 쟤하고 연애하고 싶어’ 하는 욕망하고는 다릅니다. 연애하고 싶고 좋은 차를 가지고 싶고 사업에 성공하고 싶은 젊은이들의 욕망은 어느 정도 인생에서 필요합니다. 그런데 노욕은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죽기 싫다는, 살고 싶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노욕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30~40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 사이에 연애 감정 같은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존경이나 우애도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배우자가 정말 싫습니다. 그런데 이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번듯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 끌려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식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봐도 문제가 많은 자식인데 끝내 내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보기에 진짜 나쁜 부모가 되기 싫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모습이 무너질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노욕하고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쨌든 죽음을 받아들이되, 죽음에 과잉 반응을 하면 노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고 그 누구도 영원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에는
나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 나도 언젠가 죽는구나.’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당연히 있지만, 그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눈이 멀어버리면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합니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은 조화뿐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종이 위에 잉크로 쓴 사랑밖에 없습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