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9] 참선곡 3

누군가는 ‘나 같이 나이 먹은 사람이 깨달을 수조차 있겠어?’ 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나라 불교는 1초 만에 깨달을 수 있고 깨달으면 그 즉시 여래의 경지로 들어가는 간화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깨닫기만 하면 출가자든 재가자든 구별할 것 없이 단박에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불교다.
참선곡 세 번째 시간은 어떠한 깨달음이 있을 때 ‘내가 깨쳤구나’ 하고 자기 스스로 검증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가서 인가를 받으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인연 따라 자유롭고 너그럽게 지내라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깨달은 다음이라도 ‘내가 깨달았으니 너는 내 말대로 해야 해’라는 강요 없이 빈 배 같이 떠돌다가 인연이 맞는 중생을 만나면 그 중생의 근기에 맞게 제도하는 것이 깨달은 자가 할 일이다.
일체계행(一切戒行) 지켜가면 천상인간 복수(福壽)하고
깨달은 뒤에도 계율을 지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있다. 경허스님은 일체의 계율을 잘 지키면 천상에 있는 존재들이나 인간들이 모두 복과 수명을 누린다고 이야기한다. 복을 받으려면 계를 지키면 된다. 새배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계를 지키면 복은 자동으로 따라온다. 여기에서 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오계를 말한다. 오계를 지키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다.
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먹어 빈병걸인 (貧病乞人) 괄시 말고
대비는 큰 자비심이고, 이 자비심이 나오는 배경은 너와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곧 나의 고통이라는 것. 불교사상을 공부하고 연기사상을 잘 이해한다면 더욱 깊은 자비심이 나올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다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또한 거기에서 자비심이 나온다. 다 내 자식 같다는 마음 말이다. 깨닫기 전에는 이러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일부러 노력을 해야 하고, 깨달은 후에는 내가 굳이 노력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우러나온다.
오온색신(五溫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觀)을 하고
오온색신이란 나 자신을 말한다. 내가 바로 거품 같다는 말이다. 거품은 공허한 것이다. 금방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이 육신이 나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모든 번뇌가 나오니, 그 마음을 버리는 것이 곧 깨닫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나’는 하나의 개념이다. 사랑, 정의, 평등, 자유 같은 것들이 개념이듯이 나라고 하는 것도 내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나를 몸뚱아리와 일치시키는 데에서 육체에 대한 집착이 생긴다.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관찰하여 해태심(懈怠心)을 내지 말고
역순경계란 역경계와 순경계를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경계는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다. 이와 같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 중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역경계이고 나에게 이로운 것이 순경계이다. 이러한 모든 자극을 깨어있을 때는 당연하고 꿈속에서조차 관찰해야 한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면 마음이 너무나 슬픈 경우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밥 먹고 산책하는 모든 때에 아들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괴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찰하지 못하면 슬프다, 괴롭다는 마음이 스스로 몸집을 불려 커지고, 나중에는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럴 때 마음의 병이 깊어지는 것이다.
허령(虛靈)한 나의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눈으로 마음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이 허공과 같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허령하다는 것은 비어있으면서도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혜가스님이 달마대사를 찾아가 “마음이 너무 괴로우니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을 때, 달마스님은 “그 마음을 가져오면 편하게 해주겠다”고 답한다. TV가 고장나면 TV를 가져가서 수리하듯, 힘든 마음을 가져오라고 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가져갈만한 마음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화를 내고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심심해한다. 이것이 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마음이 일을 하기 때문에 느낄 수는 없지만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음은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를 들자면, 콘센트를 꽂으면 전자기기가 작동되지만 전기를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번개가 쳤을 때 보이는 것이 전기인가? 전기에너지가 순간적으로 빛으로 바뀌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지 전기가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전기에너지라는 것이 그때그때 모습을 바꾸어서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데 우리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마음은 볼 수도느낄 수도 잡을 수도 없으므로 허공과 같이 텅 비어있는데 우리를 슬프고 괴롭고 즐겁게 하니 신통방통하다. 그러니 신령하다고, 허령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마음이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의 에너지, 힘, 기운, 작용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러한 마음을 태산같이 써나가자고 경허스님이 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