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입니다. 증심사 경내에서 마주친 한 스님이 저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는 스님인데 이야기인 즉 “스님이 법당에서 기도를 하는데 왜 직원들이 와서 못하게 말리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당시에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같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시는 겁니다. “세상천지에 스님이 어느 절이든지 가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인데 어디 기도를 막느냐”고요. 제가 다시 “제가 잘 알아보고 챙겨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또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세 번쯤 반복하다보니 짜증이 나려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한마디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는데, 괜히 시비 붙어봐야 피곤한 일이기도 하고 증심사 평판을 생각하여 다시금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넘어갔습니다.
들어보니 사정은 이렇습니다. 이 스님이 신도 두 명과 함께 참배를 와 사시예불이 끝난 후에 목탁을 치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신도인지 종무원인지 모를 재가자가 ‘사중에 말도 없이 이러시면 안 된다’며 제지를 했다는 것입니다. 저녁이 되어서 경전을 읽다 보니 마침 낮에 겪은 일을 떠오르게 하는 게송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법구경에 나오는 거만한 비구 띳사 이야기의 마지막에 실린 게송입니다.
‘그가 내게 욕을 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패배시키고 내 물건을 훔쳤다.’
이렇게 앙심을 품는다면 그 원한은 고요해지지 않으리라. (법구경 게송 3번)
‘그가 내게 욕을 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패배시키고 내 물건을 훔쳤다.’
이런 생각을 품지 않으면 그 원한은 고요해지리라. (법구경 게송 4번)
게송만 놓고 보면 참 쉽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괴로우니 네가 밉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중생의 마음입니다. 한 번 미운 사람이 생기면, 보기만 해도 속에서 열불이 나고 쳐다보기도 싫은 것이 중생들의 마음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걸 원망(怨望)이라고 합니다. 증오하는 마음입니다. 원(怨)이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누워 뒹굴 원(夗)’ 밑에 ‘마음 심(心)’을 썼습니다. 풀이하면 원망하는 마음은 누워서 뒹굴뒹굴 할 때의 마음입니다. 누워 ‘뒹굴 원(夗)’은 ‘저녁 석(夕)’에 ‘사람 인(人)’을 합쳐서 만들었습니다. 저녁에 사람이 무엇을 합니까? 해 떨어지고 할 일이 없으면 누워서 자야 하는데 잠이 안 옵니다. 왜입니까? 화가 나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이 인간 때문에 내가 잠이 안 와!”로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합니다. 이런 모양을 글자로 만든 것이 ‘누워 뒹굴 원’입니다.
이렇듯 원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입니다. 원망하면 그런 마음과 욕구가 내 안에 가득 차는 것입니다. 원망이 강해지면 무엇이 됩니까? 원한(怨恨)이 맺힙니다. 한(恨)은 ‘마음 심(忄)’ 변에 ‘어긋날 간(艮)’이 붙어서 만들어졌습니다. 마음이 어긋난 것입니다. 내 생각과 저 인간의 행동이 어긋나기에 내 마음이 괴로운 상황을 글자로 쓴 것이 한입니다. 원망이 두 배가 되어서 원한이 된 것입니다.
원한이 커지면 무엇이 됩니까? 마음 속으로 저주(詛呪)를 품습니다. 詛와, 呪는 모두 ‘주문’이라는 뜻입니다. 남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 속으로 ‘저 놈 안 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잘 되라고 하는 기도이고, 저주는 못 되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들어서 미운 마음이 커지면 원망이 되고, 원망이 커지면 원한이 되고, 원한이 사무치면 저주를 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전 상황에서는 내가 힘든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있다는 전제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미원하고 증오하고 원망하고 심지어는 원한에 사무쳐서 저주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전에는 몰랐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까 남편이 사행성 주식이라든가 부동산 투기라든가 노름이라든가 이런 걸 너무 좋아해서 집에 돈이 모일 일이 없다고 합시다. 30년을 그렇게 살면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고 남편에 대한 원망이 쌓일 것입니다. 원망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남편은 노름밖에 모른다, 가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책임감이 없다.’고 단정지어버립니다. 그리고 내 말대로 하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잔소리라도 하니 그나마 이 정도라도 유지하고 살지 잔소리마저 없었으면 이미 집도 날렸을지 모를 노릇입니다. 내 덕에 이나마 살고 있는데 남편이 내 뜻대로 안 해주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이럴 때 처방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네 뜻대로 하고 사세요. 대신에 생활비 통장은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 건드린다면, 안녕히 가세요. 우리 갈라섭시다.” 그러면 됩니다. 전혀 화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화가 납니까? 남편이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인생이 괴로워지게 마련입니다. 남의 인생에는 굳이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남’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그대로 남이라면 관여하고 싶어도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남이니까요. 그런데 남이지만 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족, 가까운 친구, 직장 동료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인생살이에 ‘이러네 저러네’ 간섭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내 뜻대로 하지 않으면 짜증이 생기고 화가 나고 마음에 미움이 쌓이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돈 버느라 일 하느라 연애하느라 바쁘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시간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름 살아온 경험도 풍부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변 일에 하나 둘 간섭합니다. 이게 다 애정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못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남의 인생에다 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누구에게도 ‘이 길로 가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길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경문〉에서 야운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좋은 의사와 같아서 병을 알아 약을 지어주지만, 먹고 안 먹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며, 또한 훌륭한 길잡이와 같아서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하지만, 듣고 가지 않는 것은 길잡이의 허물이 아니니라.”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멱살을 잡고 끌고 가지는 못합니다. 부처님도 못 하는 게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못하시는 일을 하겠다며 억지를 부리니,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한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못하는 일을 어찌 우리같은 일개 중생들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남이지만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남을 내 것처럼 여기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면 인생을 그나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남의 인생에 간섭하려 말고 내 인생이라도 제대로 살자’는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법문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