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속이야기

노인을 버리던 나라

경전 속 옛날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무더운 여름이다. 어린 시절 이맘때면 꼭 외갓집을 다녀오곤 하였다. 비둘기 완행열차에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그러고도 또 5리를 걸어야 닿는 외진 시골이었다. 하지만 여동생을 등에 업고서 옷가지에 선물꾸러미를 양손 가득 쥔 어머니도, 팔랑개비처럼 나부대며 장난질에 여념이 없던 철부지 형과 나도, 늘 그 길이 반갑고 흥겨웠다.

그 시절 외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대청마루에 드러누우면 부채질과 함께 시작되던 외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보따리, 살포시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설레는 그 아름다운 추억은 늘 이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얘들아,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들은 풍부한 상상력이 가미된 이야기, 그야말로 어린이들이나 좋아할 동화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도리가 담겨있었다. 그래서 할머니이야기는 늘 이렇게 마무리되곤 하였다. “그러니 얘들아, 사람은 말이야~”

불교 경론에도 “옛날 아주 먼 옛날에~”로 시작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전생과 현생을 넘나들고, 때로는 지옥과 하늘나라를 오가기도 하는 그 이야기들은 다소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혹자는 ‘전설傳說’이나 ‘설화說話’로 분류하며 그 가치를 다소 폄훼貶毁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전 속 이야기들은 외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만큼이나 쉽고 재미나며 많은 교훈들을 담고 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불전 속 이야기들은 늘 이렇게 마무리되곤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디 여기에 소개하는 불전 속 이야기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보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편안하게 하기만을 기대한다.

아득히 먼 옛날에 기로국(棄老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서는 부모가 나이가 들면 멀리 내다 버리는 것이
법이었다. 그때 그 나라에 한 대신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 국법에 따라 멀리 내다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대신은 효심이 깊어 차마 그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땅 속에 비밀의 방을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무서운 얼굴을 한 하늘나라 신이 왕궁에 나타났다. 신은 뱀 두 마리를 왕의 면전에 던지면서 협박하였다.

“이 두 마리 중 어느 놈이 암컷이고, 어느 놈이 수컷이냐?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면 이레 뒤에 너희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리라.”

두 마리 뱀은 길이와 굵기에다 문양까지 똑같았다. 왕과 신하들은 난감해하며 공포에 떨었다. 파멸을 예고한 날짜가 다가오자, 다급해진 왕이 온 나라에 포고하였다.

“똑같이 생긴 뱀의 암수를 구별하는 자에게 후한 벼슬과 상을 내리리라.”

궁에서 집으로 돌아온 대신은 아버지가 잡술 음식을 챙겨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땅굴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아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아들은 낮에 궁에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늙은 아버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한 소란이구나.” 놀란 대신이 물었다.
“아버지는 그 뱀의 암수를 구분하실 수 있습니까?” “쉽지. 뱀뿐 아니라 모든 숫컷이 보드라운 것이 닿으면 가만히 있지를 못해! 비단이나 부드러운 천 위에다 그 뱀들을 놓아보거라. 요동치면서 비비적거리면 수컷이고,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놈은 암컷이다.”

다음날 대신은 왕궁으로 돌아가 왕에게 그 답을 제안하였다. 대신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암컷과 수컷이 명확하게 구별되었다.

그러자 하늘나라 신이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왕이 타는 큰 코끼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코끼리는 무게가 얼마나 되는가?”

산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진 코끼리의 무게를 잴만한 큰 저울이 그 나라에는 없었다. 난감해 하는 왕과 신하들의 표정을 보고,

하늘나라 신이 다시 험상궂은 표정으로 협박하였다.

“무게를 정확히 말하거라. 조금이라도 틀리면 너희 나라를 파괴하리라.”

신하들이 머리를 모아 의논해 보았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날 저녁, 궁에서 돌아온 대신이 다시 아버지가 계신 비밀의 방으로 찾아갔다.

“아버지 산더미만한 코끼리의 무게도 정확히 알 수 있습니까?”
“그것도 쉽지. 코끼리를 배에 싣고 큰 못에 띄워 배가 어디까지 잠기는지 표시하거라. 그리고 다시 코끼리를 내리고 그 배에다 돌을 실거라. 앞서 표시했던 곳까지 물에 잠기면 그 돌을 꺼내 하나하나 무게를 달아 합산하거라. 그게 코끼리 무게다.”

대신은 아버지의 지혜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음날 대신이 왕궁으로 달려가 하늘나라 신에게 답하자, 신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이 나라에는 현명한 사람들이 많구나. 좋다. 마지막 문제를 내겠다. 이 문제를 맞히면 더 이상 너희를 괴롭히지 않고 많은 보물까지 주리라.”

신이 크기며 생김새가 똑같은 두 마리 말을 끌고와서 물었다.

“이 두 마리 중 하나는 어미이고 하나는 새끼이다. 누가 어미냐?”

왕과 신하 중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밤 대신이 또 비밀의 방으로 찾아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두 마리 말 사이에다 말들이 좋아하는 풀을 한다발 던져 보거라. 그 풀을 머리로 상대에게 자꾸 미는 놈이 어미고, 덮썩 물어서 자기쪽으로 당기는 놈이 새끼란다.”

말 끝에 아버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짐승만 그런 게 아니란다.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다음날 대신이 왕궁으로 가서 답하자, 하늘나라 신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너희를 영원히 보호하리라.”

왕 역시 기뻐하며 대신에게 물었다.

“그대 덕분에 우리나라가 재난을 벗어났소. 소원을 말해 보시오. 국토건 재물이건 내 무엇이건 주겠오.”

그러자 대신이 왕에게 고백하였다.

“대왕이여, 사실은 저의 지혜가 아닙니다. 저에게 늙은 아버지가 계십니다. 저는 차마 아버지를 버릴 수 없어 국법을 위반하고 땅속에 비밀의 방을 만들어 모셨습니다. 제가 한 대답은 모두 아버지 지혜이지, 저의 지혜가 아닙니다. 부디 대왕께서 온 나라에 명령하여 늙으신 부모님을 정성컷 봉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저의 소원은 이것뿐입니다.”

대신의 효심에 감동한 대왕은 곧 다음과 같이 법령을 선포하였다.

“늙으신 부모님을 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는 자에게 큰 벌을 내릴 것이다.”

이는 『잡보장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지혜란 ‘삶’이라는 고단한 여정이 빚어낸 소중한 경험치이지, 무미건조한 정보의 총합이 아니다. 노동력과 생산력 그리고 소유한 자본으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경향이 심화되다보니, 역경의 삶을 꿋꿋이 이겨낸 노인의 가치와 그 지혜가 다소 과소평가되는 요즘이다. ‘효(孝)와 경(敬)을 받드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표어가 되살아나기를 모쪼록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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