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자치샘
진각국사 탄생설화 자취담긴 화순 제일 샘물 사람이 모여 사는 부락의 근본은 물이다. 무등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화순의 중심도 물이 샘솟는 곳이다. 화순 군청과 남산 사이에 자리한 자치샘이 그곳이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화순읍내 주민치고 자치샘 물을 마시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른 새벽이면 집집마다 아낙들이 자치샘에서 정화수를 떠와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리고 이 물로 밥을 했다. 아이들이 깰 무렵부터는 물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했다. 낮과 밤에는 샘가에 있는 당산나무 아래에 삼삼오오 모여 세상사 무거운 짐을 내려놓곤 했다. 그래서 화순5일 장도 자치샘 인근 공터에서 열렸다.
겨울이면 따뜻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자치샘은 철분과 염분이 없어 화순의 명물인 두부와 기정떡을 낳게 했다. 누룩으로 발효한 기정떡은 여름에도 쉽게 상하지 않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떡이다. 자치샘물로 옷을 빨면 유난히 깨끗하고, 술을 빚으면 맛이 일품이었다.
화순의 생명수였던 자치샘은 물 맛 만큼이나 명칭의 유래 또한 흥미롭다.화순에는 열 개의 물맛 좋은 샘이 있었다. 화순십정으로 불리는 샘은 남산 앞 자치샘을 중심으로 한천(寒泉), 성내천(城內泉), 동천(洞泉), 매화천, 덕촌천, 광덕천, 죽림천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네 샘 두 곳이다. 이중에 으뜸이 자치샘이다. 송광사 2대 국사인 진각혜심 스님의 자취가 남아있어 ‘자취샘’으로 불렀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치샘’으로 바뀌었다.
자치샘에 서린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1178~1234)의 자취는 이러하다. 고려 명종시절, 화순의 말단 향리 배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다. 그러자 16살된 배씨의 어린 딸이 새벽마다 샘에서 정화수를 떠다가 아버지의 석방을 기원했다.
그해 겨울, 배씨 처녀는 샘물에 떠있는 물외를 먹고 아이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옥살이를 하는중에 처녀인 딸마져 아이를 가졌으니 어머니의 고심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배씨 처녀의 어머니는 딸이 아이를 낳자 아무도 모르게 핏덩이 어린아이를 마을밖에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어디선가 학이 날아와 날개를 펴고 갓난아이를 보살폈다. 이것을 지켜본 주민들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 하여 관가에 알렸고, 아이의 엄마인 배씨 딸이 현감에게 불려갔다.
배씨 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현감은 배씨의 억울함을 알고 옥에서 풀어주었다. 배씨 처녀가 매일 정성을 다해 받아온 정화수 샘이 바로 자치샘이다. 그리고 학이 살린 아이는 훗날 보조국사 지눌스님에 이어 송광사2대 주지를 지낸 진각국사이다.
오래전 화순 주민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담은 진각국사 유적비를 화순의 남산에 새겨놓았다. 배씨 처녀의 원력에 따라 화순 주민들도 자치샘에서 길어온 정화수로 가정의 편안과 안녕을 기원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자치샘은 화순민의 식수원 역할을 상수도에 넘겨준 뒤에도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는 주민들의 발길이 계속됐다. 자치샘의 정화수를 받아와 기도하고 음식을 장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들어 급속한 도시화에 밀린 자치샘도 개발론자들에 의해 천덕꾸러기가 되고말았다. 샘가에 비스듬히 누운 당산나무와 물이 흐르던 도랑, 빨래터가 사라진 지 오래이고 그곳에 커다란 도로가 생겼다. 작은 우물로 변한 자치샘은 그후에도 아스팔트로 덮여질 처지가 되었는데 다행히 지역주민들의 민원으로 도로 한복판에 흔적은 남기게 됐다. 자치샘을 기억하는 이들은 “예전의 자치샘을 다시 살려야한다”고 주장한다. 진각국사가 탄생한 생명의 원천 자치샘에서 떠온 정화수를 그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