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란 무엇인가?
2021년 증심사 온라인 불교학당 첫 번째 주제는 ‘종교란 무엇인가?’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불교가 종교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종교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종교가 왜 탄생했는지, 과학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종교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불교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종교라는 범주에 딱 들어맞는 것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종교는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더 근본적으로는 과연 인간에게 종교란 필요한 것인가? 이런 문제를 고민해보는 시간으로 종교가 무엇인지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몇 가지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겠다. 템플스테이 등으로 절에 와서 이야기를 나눈 분들의 고민을 분류하자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 어떻게 하면 화를 안 낼 수 있을까?
- 나는 자존감이 너무 낮아.
-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지 잘 모르겠어
이 고민들을 한 번씩 짚어보자. 첫 번째, ‘어떻게 하면 화를 안 낼 수 있을까?’ 화를 내는 이유는 실은 간단하다.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나는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고통스러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답답한 것, 이것이 고민이다.
두 번째, ‘나는 자존감이 너무 낮다.’ 첫 번째 경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경험을 어릴 때부터 많이 했거나, 무엇을 하려고 할 때마다 주변에서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들이 쌓이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자존감의 기저에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감이 부족하니까 자존감이 낮고, 또한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니까 자신감도 잃게 되는 패턴이 반복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고민의 원인은 결국 나에게 있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느냐의 문제다.
세 번째,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잠시라도 한 가지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걱정거리들이 줄을 잇는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은 내 앞에 닥칠 미래가 확실하지 않고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내가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다.’ 우리들은 흔히 ‘뭔가를 하려면 그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욕망해야 한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욕망이 있어야 의지가 나오고 의지가 있어야 실행을 하고 실행을 해야 미래를 주도할 수 있다고 막연하고도 본능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왜 미래를 주도하고 싶어하는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고 싶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본능적으로 욕망에의 강박으로 발현한다.
이처럼 현대인들이 하는 고민의 2대 요소는 ‘나’와 ‘불안’이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나’와 결합하면 필연적으로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 괴로움을 자각하는 상태가 고민이다. 고민이 나와 불안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에는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런 질문을 던져보겠다.
‘내가 지금 커피를 마시면 이 커피는 어느 시점부터 내가 될까?’
커피를 마시면 커피라는 액체가 몸속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 커피가 입술에 닿는 순간 내가 되는가? 커피를 입안에 머금고 있을 때 나의 일부가 되는가? 커피가 식도를 타고 위 안에 들어갔을 때의 상태를 나의 일부라고 봐야 하는가? 커피가 분해되어서 대장, 소장, 간으로 갔을 때 내 몸의 일부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손은 어떤가? 이 손은 나인가? 이 손은 ‘나의’ 손이지 ‘나’는 아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내가 무엇인지 당최 모르겠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무언가 문제가 있으니까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다음으로는 ‘불안’을 살펴보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20세기를 풍미했던 현대철학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저것이 의자다.’라고 말하는 것은 저 무언가가 가진 본질, 저 무언가가 존재하는 이유, 저 무언가의 존재의 목적이 ‘앉을 수 있게 하는’ 의자라고 하는 것이다. 본질이란 A를 A이게끔 하는 그 무엇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이게끔, 사람을 사람이게끔 하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내 삶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인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실존이다. 내가 여기에 그저 있는 것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서, 목적이 있어서, 나의 본질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도적으로 능동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피동적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것을 피투성(被投性)이라고 표현한다. 삶의 본질은 피투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하다.
종교는 절대적인 존재인 신을 상정하며, 이 절대적인 존재와 합일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인 불안을 극복하려고 한다. 인도 철학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인 브라만과 개인적인 나인 아트만이 하나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했고, 서구의 기독교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에 복종하고 신에게 내 자신을 온전히 바칠 때 인간의 원죄, 우리의 잘못, 두려움,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열반을 하기 위해서는 번뇌하는 내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게 바로 열반이라고 말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착각일 뿐이며, 이런 착각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불러일으킨다고 설했다. 존재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오직 연기할 뿐이다. 부처님은 이 사실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삶의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불교의 핵심은 종교가 아니지만 분명하게 종교의 외피를 쓰고 있다. 불교는 종교의 3요소인 교주, 교리, 교단을 모두 갖추고 있기에 종교의 외피를 썼다고 할 것이나 절대자를 상정하기 않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불교도 종교이기 때문에 삶의 실천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나를 바꾸는 수행 시스템으로서의 실천체계고 두 번째는 우리 삶의 윤리적인 지침과 도덕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실천체계다. 부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나도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 불교의 목표다. 이것이 종교적 외피다. 그러나 핵심은 나를 바꾸는 수행이 시스템, 즉 실천체계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