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절따라특집

백제불교 일본불교 그리고 우리불교 (3)

절9. 은각사

사실상 답사 마지막날인 셋째 날,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 은각사(긴카쿠지)로 향했다. 말로만 들었던 금각사, 은각사 중 은각사만 다녀오기로 한 참이다. 버스 주차장에서 절까지 도보로 걸어가는데, 처음 지나치는 개울을 따라 이름 붙은 것이 ‘철학의 길’이다. 일본의 유명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이 길을 산책하면서 사색에 젖었다고 해서 그렇단다.

긴카쿠지로 이어지는 얕은 오르막 양 옆으로 카페며 식당, 기념품 가게들이 있지만 어제 청수사처럼 붐비는 모양새는 아니다. 정성껏 가꿔놓은 화단 앞에선 핸드폰 카메라를 작동하며 멈춰서게 되기도 하고, 막 장사 준비를 시작하는 만둣가게에는 한 번 들어가보고도 싶었다. 언젠가 교토에 또 오게 된다면 긴카쿠지는 반드시 이른 아침에 갈 것. 공식처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임제종에 속하는 긴카쿠지는 1482년 무로마치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산장으로 건립한 데에서 시작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할아버지인 무로마지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역작 녹원사를 모방하여 이 절을 건립했다. 녹원사는 휘황찬란한 금색 전각으로 유명한 금각사(킨카쿠지)의 다른 이름이다.

은각사 역시 지쇼지(慈照寺)라는 정식 명칭이 있으나 금각사에 대비되는 관음전이 은각이라 불리게 되어 은각사라는 별칭이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별장이었던 은각사는 요시마사 사후에 국보 관음전이 있는 사찰로 변경됐다.

긴키쿠지는 일본의 와비사비(侘び寂び) 정신을 형상화한 절로 이름났다. 와비사비는 와비와 사비가 결합된 단어로,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와비는 본디 ‘실의’, ‘쓸쓸함’이라는 뜻을 지녔고 사비는 ‘퇴보’ 혹은 ‘빛바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세상과 동떨어져 자연 속에서 홀로 지내는 쓸쓸한 상태이지만 동시에 오래되고 단순한 것들에 대한 예찬의 표현으로 쓰인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고졸한 그대로 귀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을 뜻하기도 하다.

일반 관광객들은 긴카쿠지를 절이라기보다 고즈넉한 정원으로 인식한다. 긴쿄치라는 연못을 중심으로 관음전인 긴카쿠 전각이 동향으로 세워져 있다. 흰 모래를 직선 형태로 굳혀서 만든 긴샤단과 후지산 모양을 본뜬 고게쓰다이가 관음전과 어우러져 독특한 정취를 조성하고 있다. 온통 이끼로 뒤덮인 정원은 ‘자연 그대로’의 매력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인위적인 냄새가 더욱 짙게 풍기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박제된 자연의 느낌으로 인상깊게 다가온다.

정원과 전각의 역사나 스토리보다는 이른 아침 산책길로써의 의미가 더 짙었던 은각사에서 셋째 날 일정을 평화롭게 열었다.

절10.  광륭사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손가락을 오른쪽 뺨에 대어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 현세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까 상념에 잠긴 미륵보살님.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쌍둥이로 불리는 반가사유상이 일본에도 있다. 광륭사(고류지)에 안치되어 있는 일본 국보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일행은 고류지 영보전으로 직행했다. 미륵보살반가상을 친견하기 위해서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인간 실존의 최고의 모습’이라 감탄한 미륵보살반가상은 7세기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식과 형태가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상과 비슷하고, 아스카시대 불상으로는 아주 예외적인 형태이며, <일본서기>에 이 미륵보살상을 신라 사신이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어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아스카 시대 목조불상은 대게 일본의 녹나무로 조성된 데 반해 이 보살상은 우리나라 경상북도 지역에서 자생하는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영보전의 메인 홀, 아주 어둡게 조성해놓은 실내에 미륵보살반가상이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다. 1904년 보수공사 때에 미묘한 얼굴의 한국풍을 훼손해버렸다는 사전 정보를 듣고 간 참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얼굴을 뜯어보기보다는 홀로 고고한 그 자태에 매료되어 한참동안 홀린듯 쳐다보게 되었다. 아직 한국에서도 실제 본적 없는 미륵보살반가상을 멀리 일본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은근히 마음을 고무적이게 만들었다. 미륵보살반가상 곁에는 상투모양의 모계를 튼 보계미륵 반가상도 안치되어 있다. 이 역시 일본의 국보다.

미륵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보살’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처님’이라고도 한다. 미륵보살, 미륵불이라는 명칭이 혼용되다시피 쓰이는데, 미륵불 미륵보살은 과연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간단히 말하면 미륵불은 부처가 된 이후이고 미륵보살은 부처가 되기 이전의 미륵불이다. 개념이 헷갈린다면 미륵불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정의 내릴 필요가 있다.

미륵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돌아가시고 56억7천만 년 후에 나타날 미래의 부처님을 말한다. 미륵부처님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한 후(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를 이뤘다) 3회에 걸쳐 중생을 제도할 설법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이 세 번의 설법을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첫 번째 설법에서는 96억 명을, 두 번째 설법에서는 94억 명을, 마지막 세 번째 설법에서는 96억 명을 제도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중생이 용화세계에 태어나 용화삼회의 설법을 직접 듣기 위해서는 수행과 보시와 공덕의 과보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미륵신앙의 토대가 된다.

또한 미륵세계에 미륵부처님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전륜성왕이 먼저 세상에 나와 미륵불이 등장할 세계를 태평성대로 만들어 놓는 것이 공식처럼 되어 있기에, 지나온 역사에서 미륵사상은 세상을 태평성대로 만들겠다는 지배자들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스스로를 ‘메시아’로 포장하는 사이비 종교로 오용되기도 하고 말이다.

한편,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 7천만 년 후의 세상에서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은보살은 때가 되어 사바세계에 나가기 전까지 도솔천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 때에는 아직 부처가 되지 않은 보살의 신분(?)이다. 미륵보살이 부처님은 쓰지 않는 보관을 쓰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가 될 것이지만 아직은 부처가 되지 않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 영보전을 나오는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사전 자료에서 읽은 것처럼 미륵보살이 우주를 유영하듯 아득하지도 않았고, 미륵보살과 나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고요하지도 않았지만, 귀한 부처님이라고 하니 더 감상에 젖어서 관람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무언가 특별함 느끼기를 강박하려는 마음이 불편해, 부처님을 뒤로하고 나오는 것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고류지는 반가사유상의 사찰이지만, 일본인들에게 고류지는 성덕태자를 신으로 모시는 성덕태자 신앙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본당인 상궁왕원 태자전은 1730년 재건된 것으로, 1120년 쇼토쿠 태자 서거 500주기를 맞아 목조 태자상을 모셨다. 헤이안시대부터 역대 천황 즉위식 때 천황이 입은 도포를 쇼토쿠 태자상에 바치며 고대 일본에서 국가의 기틀을 잡은 태자에게 존경을 표시한다고 한다. 현재 태자상이 입고 있는 도포는 나루히토 천황이 즉위식 때 입었던 옷이라고.

절11. 천룡사

교토의 서쪽에는 일본의 벚꽃 명소이자 단풍 명소인 아라시야마가 있다. 아라시야마는 지명이자 산 이름으로, 명승지인 도월교와 영화 <게이샤의 추억>의 무대가 된 죽림으로 유명하다. 이런 아라시야마은 고대 삼국 도래인들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아스카 시대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에 백제와 가야계 도래인들의 역할이 컸다면, 교토로 수도를 옮길 때에는 하타씨를 필두로 한 신라계 도래인과 히가시야마 일대의 고구려 도래인들이 힘을 썼다고 한다. 아라시야마는 하타씨를 비롯한 신라계 도래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곳 아라시야마에 자리한 사찰 중 가장 유명한 절이 바로 교토에서의 마지막 답사지인 천룡사(텐류지)다. 텐류지는 임제종 텐류지파 대본산으로, 일본 정원 양식의 시초라고 하는 무소 소세키 스님이 만든 정원이 인상적인 절이다. 소겐치(曹源池)는 연못 주위를 산책하면서 변화하는 정경을 즐기는 회유식 정원을 말한다. 이 소겐치가 텐류지에 펼쳐져 있다. 일본 최초의, 제1호 사적/특별명승지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텐류지는 1339년 사가 천황의 황후가 개창한 단린지 절이 있던 자리에 지어진 곳이다. 가마쿠라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 천황이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융성했던 무소 소세키 유파의 근거지로 교토에 있는 임제종 사찰 중 가장 큰 사격을 자랑했지만, 1356년부터 8번의 화재가 나면서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전각은 대부분 메이지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에도막부 후기에 지어진 법당 안에는 약 700년 전의 용 그림인 운룡도가 있는데, 텐류지가 자랑하는 회화작품이다. 현대에 그려진 달마도 역시 인기가 많다고 한다.

텐류지는 ‘꽃’으로 장엄된 절이었다. 다른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절이라기보다는 정원에 가까운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다른 여느 절들과는 달리 식물마다 명패를 달아놓은 것이 참으로 ‘소비자 친화적’으로 느껴졌다. 한자, 히라가나, 그리고 한글로 적힌 명패를 보고 동백이니 랍매화니 마취목이니 하는 꽃들을 더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식물원을 방불케하는 정원에서 꽃다운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 걸음이 자연스럽게 아라시야마 죽림으로 향하게 된다. 아라시야마는 질 좋은 대나무로 유명한 지역이란다. 죽도의 대부분이 아라시야마산 대나무로 만들어진다고. 과연 양손으로 감싸도 넘칠 만큼 큰 대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텐류지를 거쳐 첫 날 참배하지 못한 동대사에 가기 위해 나라로 향하면서 교토에서의 일정이 마무리됐다.

길따라절따라 교토 답사를 마치고 꼬박 일주일간 월간<증심> 원고를 준비하기 위한 공부를 했고, 그 다음 일주일 동안은 11개 절의 세부 여행기를 적어 내려가며 다시 한 번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려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나라와 교토의 사찰 역사를 아는 것은 일본의 역사를 아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남의 나라 역사를, 그것도 다녀온 절 11곳이라는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줄줄 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줄줄은 아니고, 목걸이의 원료가 되는 몇 개 재료를 손질하는 데에서 일본 답사를 마무리하지만, 세상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이웃나라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개인적으로는 무지 뜻깊은 여행이라 하겠다.

유입된 맥락은 같지만 다르게 발전해온 우리불교와 일본불교를 비교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서 우리불교의 나아갈 길 혹은 개인적 신행의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답사를 다녀온지 보름. 교토에서의 기억은 벌써 많은 부분 휘발되고 없다. 해야 할 일이어서 정리해 놓은 이 교토 여행의 기록은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이 빈약한 자료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낯선 용어로 점철된 친절하지 않은 여행기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나에게, 언젠가 다시 한 번 자의로 교토의 절들을 답사할 나에게만은 적절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자료이지 않을까, 그런 위안을 해본다.

벌써 이 절이 그 절이었는지 뒤섞이고 경계가 흐려진 가운데, 이 삼일의 기록으로 하여금 오래오래 교토를 여행하던 그 때의 나를 추억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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