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희망에 대하여

1970년대 초반에는 텔레비전에서 권투 중계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가 외국에서 경기를 할 때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중계를 보고는 했습니다. 이 선수가 막 얻어터지고 코너에 몰리면 사람들은 ‘에이~ 졌네 졌어!’ 하고 자리를 떠버리고, 저는 혼자서 ‘이겨야 되는데, 이겨야 되는데!’ 중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어린 마음에는 우리 선수가 이기길 바라는 게 희망이었습니다. 내가 응원하는 사람이 이겼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희망, 소원이 마음속에 가득 차있었던 겁니다.

희망, 소망, 바람, 소원은 다 같은 말입니다. 뭔가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희망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고양이도 희망이 있을까? 멧돼지도 희망이 있을까? 나비에게도 희망이 있을까? 반대로 희망 없이 사는 삶이 인간적인 삶일 수 있을까?

절에 기도하러 오는 분들 중에는 일정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쉬운 게 하나도 없는 우리 딸내미가 시집을 안 간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는 고민도 아닙니다. 가족도 없고 집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애인도 없고 변변한 친구도 없고 돈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볼 때는 호강에 받친 소리입니다. 그런데 본인 입장에서는 나름 간절합니다. 왜 그럴까 관찰을 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보살님들은 걱정 거리가 없으면 살아가는 맛이 없구나! 걱정이 없으면 어떻게든 걱정할 거리를 찾는구나.”

다시 말하면 희망할 거리가 없으면 어떻게든 뭔가 바라는 바를 찾고자 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할 거리가 없으면 어떻게든 뭔가 원하는 바를 찾으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희망은 삶의 필수요소입니다. 희망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희망이라는 것은 과연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전개될까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불행 중 하나는 내가 뭘 원하고 뭘 싫어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나도 괴롭지만 같이 사는 주변 사람들도 불행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잘 안 풀리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이 말 안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하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할 것이라는 아무런 근거 없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내 욕망대로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하는 너무나 근거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욕망을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내면 충돌하고 부딪치고 변형되고 희석되고 왜곡됩니다. 나의 욕망을 구체화시키고 현실화시키고 언어화시키는 과정에서, 나의 욕망은 깨지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때 하는 말이 이겁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네.” 그러나 사실은 그 말을 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내 뜻’이 뭔지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전에는 내 뜻이 뭔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욕망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알게 된 겁니다. 시작은 그저 막연하고 두루무술한 뭔가를 하고 싶은 정도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현실화 되는 과정에서,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자신이 원했던 것이 점점 분명해진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된 이유는 내가 내 뜻을 또렷하게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뜻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상처받은 것 뿐입니다. 그런데도 제대로 알지 못한 자신은 보지 못하고 충돌하는 주변 환경과 다른 사람들을 탓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합니다.

이렇게 인생을 사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삽니다. 희망, 소망, 바람 모두 욕망의 표현입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바라는 바입니다. 바랄 희(希)에 바랄 망(望), 바라고 바란다는 희망과 같은 말입니다. 바라는 바, 즉 소원과 희망의 차이를 굳이 두자면 소원은 내가 아닌 남이 이뤄주기는 바라는 것이고 희망은 내가 노력해서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같은 바람이고 욕망이라면, 그래서 내게 소원이 있다면 소원을 희망으로 바꿔야 할 겁니다. 남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준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희망만 하고 있으면 희망이 이루어집니까? 아닙니다. 행동을 하려면 거기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희망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희망이 현실화될 것입니다. 소원을 희망으로 바꾸고 희망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과정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자각된 희망은 질적으로 완전히 변화합니다. 자각된 희망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지’라고 부릅니다.

누군가 기필코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겠다고 할 때, 그 출발은 무엇입니까? 서울대에 가고 싶다는 욕망이었습니다. 이 욕망을 되새기고 관찰하고 스스로 이루겠다고 결심하자 희망이 되었고,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하겠다’로 바꾸자 의지가 되었고, 이것을 좀 더 논리화시키고 체계화시키자 비전이 되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면 이러한 자각된 희망은 의지이며, 그것은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전망, 비전, 실천전략이 됩니다.

막연하고 애매하고 스스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종의 감정 덩어리와 같은 욕망을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산 자에게 욕망이라는 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의지로 바꾸는 일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일입니다. 욕망을 의지로 바꾸기 위해서는 내 욕망을 자각하고 관찰하여 그것을 의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을 더 체계화시켜서 하나의 전망과 비전으로 세울 때 자신의 인생이 건강한 욕망에 따라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욕망을 희망으로, 의지로 발전시키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와 생물학적으로 아주 가까운 원숭이를 보면 무리 지어서 나무 사이를 오가며 과일도 따먹고 곤충도 잡아먹으면서 살아갑니다. 욕망대로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온갖 관계가 얽히고설키고 온갖 인연들이 횡으로 종으로 뒤얽힌 이 사회에서 욕망이라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중심에 세우고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욕망이 무엇인지를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는 것이 희망을 잃지 않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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