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하는 마음
2019년 7월 29일 백중 4재 법문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법에 나선 이유는 나 혼자 행복하지 말고 다른 중생들도 다 같이 영원한 행복을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가 전부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행복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금생의 행복이요, 두 번째는 내생의 행복이고, 세 번째는 영원한 행복입니다.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궁극의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행복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열반은 번뇌의 불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영원한 행복이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계율을 지키고[戒], 참선하여 선정을 닦고[定], 지혜의 눈을 여는[慧]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계를 지킴으로써 내 몸을 잘 다스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침내 지혜가 열려 열반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의식주에 얽매이지 않고 선정을 닦는 수행만 하며 살아간다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보시와 봉사로 이루는 행복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보시와 지계를 꾸준히 행하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라고 하면 재물을 시주하는 물질적 보시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시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시의 의미를 넓게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모든 행위가 다 보시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봉사’가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보시의 의미와 가깝습니다.
봉사는 돈을 기부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재능이 있으면 재능으로 봉사하고, 특별한 재능 없으면 육체노동으로 봉사하고,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기부해서 봉사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마음으로 봉사하면 됩니다. 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봉사입니다.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보시’는 ‘봉사’입니다.
봉사는 타인에게 내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기 때문에 봉사에 임하는 마음은 한결같아야 합니다. 힘들다고 안 하고 바쁘다고 안 하고 기분 나쁘다고 혹은 기분 좋다고 안 하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선택적으로 하는 봉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봉사를 하면서도 내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면 속으로 짜증이 나고 그것은 필히 얼굴에 나타납니다.
봉사는 또한 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상대의 지위고하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다만 한결같이 내 자신을 낮추는 것이 봉사입니다. 한결같이 평등하게 나 자신을 낮추는 봉사를 열심히 하면 금생에 복이 찾아옵니다.
지계와 도덕적인 생활로 쌓아가는 행복
다음은 지계(持戒)입니다. 보살계본에 나오는 48계를 모두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몰라도 됩니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사음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 마시지 않는 이 다섯 가지 계만 지키면 됩니다.
지계라고 하면 억지로 참고 인내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키면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고는 합니다. 그러나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를 지키는 생활은 도덕적인 생활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도덕성은 결코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다섯 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계율이 불살생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참 애매모호합니다.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두 발 짐승, 네 발 짐승, 어류 등을 먹게 됩니다. 채식하는 스님들은 풀을 먹습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풀도 생명입니다. 풀을 먹는 것도 살생입니다. 다른 어떤 생명을 죽이지 않고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식물처럼 광합성을 하지 않는 이상, 살생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살생, 불자의 양심을 거스르는 살생은 하지 말자는 겁니다.
만일 불자의 양심에 거스르는 살생을 했다면 참회해야 합니다. 제가 송광사 강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돌아가신 저의 은사 스님께서는 학인들만 보면 풀을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수업 시간에 제가 강사스님께 질문했습니다.
“방장스님은 우리나라 율사 중 제일 높은 어르신인데 왜 우리더러 살생을 하라고 합니까? 풀 뽑는 것도 살생 아닙니까?”
그러자 강사 스님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살생입니다. 제가 예전에 대만에서 공부할 때, 노스님들이 낮에는 소일삼아 마당의 풀을 뽑고 저녁이 되면 법당에 들어가서 참회를 하셨습니다. ‘풀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없어야 할 자리가 있는 법인데, 오늘 불가피하게 살생을 했습니다. 참회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방장스님의 뜻을 잘 헤아려서 풀을 뽑고 그 후에는 참회하기 바랍니다. 풀 뽑기 싫어서 이런 질문 하지 말고요.”
계를 지킨다는 것을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저 도덕적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보시와 지계, 좋은 업을 짓는 일
금생에 봉사하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말하자면 좋은 업을 짓는 것입니다. 봉사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내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고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엄격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남에게는 나를 낮추되 나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살면 금생 내지는 내생에 분명히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선업을 지으면 반드시 선한 과보로 돌아오고, 꼭 나에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업으로 작용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열심히 봉사하고 오계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으로 가기 위해서는 선정을 닦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마음을 닦고 계를 지키는 보시와 지계는 선정으로 가는 기초를 닦는 수행입니다. 이런 기초 과정은 금생과 내생에 좋은 과보를 줄 뿐 아니라 영원한 행복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