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삶과 죽은-2

2019년 7월 3일 초하루법회

사회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 메르스 사태
아무리 개인적으로 노력을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여러분도 잘 기억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스처럼 좀 유행하다 말겠지 하면서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누가 환자인지도 모르고, 감염이 되면 잠복 기간이 얼마인지 어떻게 전염이 되는지 정부도 모르고 다 모릅니다. 그때부터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가 됩니다. 웬만하면 밖에 안 나가고 모르는 사람이랑 접촉도 안 합니다. 온 사회가 공포로 뒤덮였고 메르스 확진자로 판단되면 철저하게 격리됐습니다. 온 국민이 메르스 때문에 두 달이 넘게 바짝 졸아서 살았습니다.
사실 지금이 조선시대, 고려시대였다면 전염병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몇 번 경험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전염병이 한 번 돌면 웬만한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익히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최소한 한국전쟁 이후에 우리 사회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죽음을 앞세운 자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전염병이라든가 자연재해가 생겨도 떼죽음 당하지 않습니다. 그 방어막이 바로 사회입니다. 사회가 개인을 죽음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메르스라는 놈이 사회라는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사회라는 방어막 안에서 너무나 편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상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한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는 격리였습니다. 메르스 환자 내지는 메르스로 의심되는 사람은 우리와 접촉할 수 없게 철저하게 격리시켰습니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정보를 공개하라고 합니다. 공개를 하면 대상자를 철저하게 격리시키는 한편 두려움의 타겟을 삼고, 공개하지 않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이 벌어집니다. 누가 환자인지 모르니까 아무도 못 믿고, 사소한 걸로도 싸움이 생깁니다. 공포심이 극대화되면 그렇게 됩니다.

사회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죽음을 격리시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깨달은 게 무엇이냐 하면 우리 사회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죽음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저희 할머니가 1970년대 초반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가 살던 부산은 완전히 도시화가 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집에서 염하고 상을 치렀습니다. 1990년대까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병원 영안실에서 그런 의식을 하다가 또 언제부터인가 장례식장이라는 게 따로 생겨서 장례의 모든 것을 관장합니다. 음식 준비, 상복, 발인, 나중에는 아예 화장하는 것까지 돈만 내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 그리고 죽어있는 사람과 전혀 접촉하지 않고 살아도 생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죽음에 가까워지는 사람은 요양병원으로 격리시킵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습니다. 비록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지만 같은 가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에 걸리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온몸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그리고 죽은 다음에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까지,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온 가족이 지켜보고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죽음을 접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죽음은 기껏해야 영정사진 정도밖에 없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철저하게 격리되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죽음과 나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살 거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하게 됩니다. 지금처럼 사회가 죽음과 우리의 삶을 격리시키는 것은 우리들 각자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몇 년 전에 했던 경험을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송광사 관음전에서 사분정근 기도를 할 때의 일입니다. 관음전 요사채는 엄청나게 습해서 벌레가 많이 나오는 곳입니다. 어느 날은 딱정벌레가 한 마리 방에 들어왔습니다. 나중에 기도하고 와서 봐도 어디 안 가고 계속 있는 겁니다. 무신경하게 넘어갔는데 다음날 보니까 그대로 죽어 있었습니다. ‘난 이 친구를 건드린 적도 없는데 왜 죽었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벌레에게 매끄러운 장판은 거의 스케이트장 같은 겁니다. 게다가 벌레가 방을 탈출하려면 자신의 몸집보다 서너배는 더 높은 문턱을 넘어야 됩니다. 방을 탈출하는 것 자체가 벌레에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도전입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들은 너무나 허무하게 그렇게 죽습니다. 너무나 쉽게 말입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는 삶이 필요한 이유
지금 우리들의 삶에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있지 않은 것은 사회라는 방어막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당연히 계속 살 거라고 생각하는 부작용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항상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
표현을 달리 하면 죽음을 염두에 두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염두(念頭)라는 말은 생각을 항상 마음의 머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면 항상 그 염두를 거쳐서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염두에 둔다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죽음이 그 생각에 고정 변수로 들어갑니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인 나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덜고 없애는 길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여기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맹점은 ‘나는 지금까지 살아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살 것이다’라는 착각이고, 이는 사람이 가진 제일 큰 맹신이기도 합니다. 눈이 먼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요.
그런 믿음을 가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이 사회가 우리를 죽음과 격리시키고 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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